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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 일삼던 친척들, 의대 입학하니 돌변...용서가 안돼요

입력
2022.08.15 04:30
수정
2022.08.15 10:3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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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부모님과 살고 있는 30대 여성입니다. 부모님이 어린 나이에 저를 낳아 조부모님 댁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야했어요.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큽니다. 함께 살던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저를 유독 미워해 힘들었는데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최근 의대에 들어가자 두 사람의 태도가 돌변했고, 그 모습을 보고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너무 힘들어요.

제가 일곱살 때였어요. 큰어머니가 당시 살던 2층집의 가파른 계단에서 순간적으로 저를 밀었다가 잡았던 상황이 있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때 느낀 공포가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큰어머니는 당시에도 이후에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계단에서 누군가에게 살짝이라도 밀리면 눈물이 날 정도로 무서워요.

언젠가 태풍이 왔을 때 바람에 끌려간 적이 있어요. 하나 뿐인 우산을 놓칠 수 없어서 질질 끌려가던 일곱 살 아이를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보고만 있었습니다. 안간힘을 쓰고 버티던 저를 미동없이 쳐다만보던 두 사람의 눈빛이 생각나요. 저는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결국 도움을 받지 못했고, 이후에도 괜찮냐 묻지 않았습니다.

같은 집에 살면서 비슷한 일을 셀 수 없이 겪었습니다. 할머니와 큰어머니에게 저는 태어나지 말아야하는 존재였지요. 알 수 없는 이유로 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습니다. '부모가 어려서 그렇다', '재수가 없다', '애 없는 친척집에 버려라' 등 수많은 욕설과 비난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서럽고 억울했지만 하소연 할 수 없었어요. 부모님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제가 태어났습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던 부모님은 저를 낳아 기르기 위해 다른 가족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경제적으로 부모님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참고 넘기며 지냈어요.

어느 날 아침에 가족들이 간밤에 먹고 남은 참외 껍질을 보고 참외가 너무나 먹고 싶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부모님께 사달라고 할 수 없어서 몰래 껍질에 붙은 참외를 먹었어요. 그 이후로 저는 참외를 먹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할머니가 절 버리라고 해도 버리지 않았고, 큰 어머니가 어린 부모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굶기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때도 지금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비난으로부터 절 지켜내기에 제 부모님은 너무 약하고 어린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어머니는 제가 지켜야하고, 아버지는 제가 지지를 해야하는 존재 같았죠.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은 '첫째는 스스로 바로 서야 윗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시는데 더 노력해서 동생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할머니와 큰어머니에게 구박받았던 기억과 상처, 가난은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의대에 합격하면서 가족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고,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어린 애가 어린 애를 낳았다'며 손가락질을 하고, 계단에서 떠밀고, 밖에서는 부끄럽다며 인사도 받아주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와서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걸 보면 분노가 치밉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꿉니다.

부모님께서는 두 사람을 용서하라고 하고, 저도 잊어버리고 싶지만 그럴수록 미움과 분노가 커지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여전히 그 시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어 너무 괴롭습니다. 어떻게 해야 제 마음이 편해질까요.

김미정(가명·32·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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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씨, 긴 사연을 상세하게 작성할 정도로 섬세함을 지닌 사람인데 살아오면서 그런 감정을 표현하기 힘든 환경에 있었던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한 일을 두고 오히려 억압돼 있던 힘든 감정이 몰아쳐 혼란스럽고 복잡해진 마음이 느껴집니다. 존재 자체가 환영 받지 못했던 그 상처가 아직 그대로인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하고 심지어 용서하라는 가족을 보면서 내 편은 아무도 없는 듯 외롭고 억울할 것 같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정씨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정서적 학대를 경험해 다양한 심리적· 신체적 문제를 겪는, 일종의 복합 트라우마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피하고 도망가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학대를 받을 경우 정반대가 됩니다. 피할 수 없으니 본인 만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해 상황을 합리화하고 감정을 감추면서 순응하는 것이죠. 미정씨 역시 가족의 큰 구도 안에서 펼쳐지는 위협적인 상황에서 극심한 불안을 느끼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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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 자기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트라우마에 장기간 노출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게 어려워져요. 미정씨는 어린 시절 내내 '할머니와 큰어머니에게 대체 뭘 잘못했는데'라는 억울함이 들었을 거에요. 하지만 더 강하게 서운했던 상대는 아마 부모님이었을 겁니다.

미정씨의 부모님은 가족의 학대를 알아차리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정서적인 보호자로서 역할을 했어야 합니다. 물론 당시 부모님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셨다고 여길 수 있지만, 자녀를 지키고 보호하는 기본적인 책무를 저버린 겁니다. 미정씨가 성인이 된 이후에라도 미정씨의 괴로운 마음을 알아주고 공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어요.

그러니 미정씨의 내면에 얼마나 억울한 감정이 쌓였을까요. 사랑받고 보호받으며 지내야할 어린 시절, 부모에게조차 힘든 마음을 내색하지 못했던 외로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수치스러운 비난과 구박을 견뎌야 했던 괴로움은 그 자체로 정서적 학대와 다름 없습니다. 이를 방관한 부모님의 잘못이 결코 작지 않아요. 나이가 어리거나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것은 부모의 사정일 뿐이죠. 미정씨의 말처럼 '버리지 않고, 굶기지 않았다'고 해서 부모 역할을 다 한 것은 아닙니다.

미정씨는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자기가 보호하고 지지해야할 존재라고 느껴왔습니다. 어린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는 강한 부담감을 갖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남들을 위해서 정작 자기 자신을 놓치는, 이른바 정서적 착취 상황이지요. 그렇게 응축됐던 감정의 덩어리가 아이러니하게도 경사스러운 대학 합격을 계기로 터진 것 같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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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무시했던 나의 감정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됐다는 마음의 신호라고 생각해보세요. 트라우마 상황에서 가장 힘든 것은 꼭꼭 숨겨뒀던 감정이 언젠가는 노출되는 겁니다. 그 감정을 직면해야지만 해결할 수 있어요.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밉다고 외면하거나 좋은 점을 억지로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내 감정을 그대로 두고 지켜보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믿을 만한 가까운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금 당장 떠오른 상대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충분히 표현하고 공감받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감정 일기'를 쓰면서 당시의 상황과 느낌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도 좋습니다. 유의할 점은, 내 감정을 절대로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 감정에 집중하는 패턴으로 바꾸는 훈련이죠.

부모님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정컨대 어린 시절 미정씨는 부모님에게 미움이나 서운함 같은 감정이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오랫동안 묻어둔 채로 지내왔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좋은 관계에서 다시 그 감정을 떠올리는 것이니 표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앞으로 미정씨 인생에서 좋은 일을 있는 그대로 누리기 위해, 좀더 진실한 관계를 맺기 위해 내 마음이 주는 신호라고 생각하면 조금 견딜만 할지 모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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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씨에게 익숙하지 않아 어렵겠지만, 가족들에게 거절하는 연습도 조금씩 해봤으면 합니다. 앞으로 할머니와 큰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이 미정씨에게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일들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또 한번의 고비가 찾아올 겁니다. 미정씨가 약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무력감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에요. 당장 거절이 어렵다면 우선은 그냥 가만히 멈추어 있기, 상대의 소소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기라도 해보세요. 상대가 갑자기 왜 이러냐며 비난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앞으로 가족관계는 미정씨의 마음이 편한 쪽으로, 주도적으로 만들라는 조언을 하고 싶어요. 문제가 있는 어른들과 함께 살 때는 미정씨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성인이고 독립을 했습니다. 원 가족과 분리돼 독립된 인격체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기 시작하는 초기 성인기를 지나고 있지요. 가족과의 인연을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감정의 주체가 돼 결정하라는 뜻입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미정씨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 상황의 고통을 깊이 이해합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최선을 다해 묵묵히 인생의 성취를 이뤄가고 있는 모습이 훌륭합니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미정씨 자신을 위해 살아갈 앞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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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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