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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의 심장과 그 하트에 깃든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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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나는 일산을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길을 잃어버렸던 도시로 기억한다. 엄밀히 말하면 고양시 일산동구 어딘가였을 것이다. 대학 2학년 만 스무 살을 갓 넘긴 어느 날 과외 학생의 집을 찾았다가 길을 잃었다.
당시 일산 과외는 우리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씩 월 8회 수업의 기준가가 30만 원이 '국룰'이었던 시대에, 일산의 부모님들은 서울에 사는 가난한 대학생들이 광역버스를 타고 먼 곳까지 오가는 걸 불쌍히 여겨 40만 원을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77번 혹은 77-1, 2번 중 하나를 타면 갈아타지 않고 한 번에 갈 수 있어, 강서 쪽에 사는 학생들은 지옥의 2호선을 타고 서울을 반 바퀴 돌아야 하는 강남이나 교통이 애매한 동작구보다 일산의 과외 자리를 선호했다. 운이 좋으면 버스에 앉아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책도 볼 수 있었으며, 바쁠 땐 시험 공부도 할 수 있었으니까. 호시탐탐 선배들이 하던 일산 과외를 탐내다 2학년 초에 겨우 하나를 물려받았는데, 첫 수업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한 적은 살면서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날 아파트의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땐 정말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아, 인간이란 아파트로 가득 찬 일산 속에서 얼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가. 눈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비슷한 가게들이 들어찬 상가와 아파트들 뿐이라 과외 학생에게 나의 위치를 알려 줄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자동차에도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의 얘기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나는 어떤 공원에 다다랐다. 수목이 우거지고, 넓은, 어린 시절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여의도 광장만큼 큰 공원이었고, 그 공원에 호수가 있었다. 호수라니. 아니, 대체 왜 도심 한복판에 공원 안 호수가 있지? 여기 뭐, 시카고야? 게다가 이 숲은 또 뭐람. 센트럴파크야?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그렇게 거대한 호수와 녹지가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걸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리 집은 화곡동이었고, 가까운 아파트 단지로는 뉴타운의 시조새 격인 목동이 있었다. 목동 단지에도 물론 공원은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기껏해야 학원에서 입시를 준비 중인 중고등학생들이 밤에 몰래 담배나 피우는 곳으로, 호수공원이 잠실 운동장이라면 놀이터 옆에 있는 경로당 정도였다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일산의 호수공원은 광교 호수공원을 보기 전까지 내가 본 가장 큰 도심 공원이었다.
일산은 대단했다. 일산에는 서울의 대학 어느 곳에나 꽤 큰 규모의 동문회를 가지고 있는 전국구 명문 백석고가 있었고, 국내에서 가장 큰 전시장인 킨텍스도 있었다. 도로는 넓었고, 수직으로 교차하며 격자 형태를 완성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멋진 것이 있었다. 일산에는 전신주가 없었다. 분당과 함께 전선지중화 작업을 거쳐 탄생한 첫 도시. 땅 아래로 초고속 인터넷망을 타고 정보가 달리는 첫 도시. 그 시절 내게 최첨단의 도시란 바로 일산이었다.
외삼촌이 얼마 후 일산으로 이사를 갔다는 점도 그 도시의 매력 중 하나였다. 외삼촌과 나는 유독 사이가 좋다. 우리 집안의 모든 인척들은 먹고 마시는 걸 그리 즐기지 않는데, 오직 두 사람, 나와 외삼촌만은 꾸준히 놀고 마시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외삼촌과의 일화 중 집안 사람들이 경악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내가 일곱 살이던 어느 날 이제 막 전역한 삼촌이 엄마에게 용돈을 타러 왔다가 나를 데리고 나가 '치맥'을 먹인 일이다. 나는 그날을 꽤 자세히 기억하는데, 집에 돌아가서는 삼촌을 감싼다며 "치킨은 많이 먹었지만 맥주는 두 스푼밖에 마시지 않았다"라고 엄마에게 증언했었다.
하여튼 그렇게 먹고 노는 걸 좋아했던 외삼촌이 일산에 사는 바람에 군에 입대할 때, 휴가 나와서, 전역해서, 하여튼 틈만 나면 용돈을 타러 가서 맛있는 걸 잔뜩 얻어먹고 왔다. 개중에는 아직 또렷하게 기억하는 음식도 있다. 예를 들면 돼지 부속고기다. 기름 양념에 조물조물 버무려 직화에 그을리듯 굽는 돼지 부속고기가 서울에서 유명세를 타기 훨씬 전, 이미 일산에선 연탄에 구운 돼지 부속고기가 향토 음식처럼 번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 집이 일산에서는 무슨 치킨 프랜차이즈 마냥 같은 상호의 분점을 잔뜩 내고 성업 중이다.
일산은 이제 신도시가 아니다. 스무 살이 훨씬 지났고, '586' 이후로는 나이를 세지 않기로 결심한 60대의 86세대 마냥 늙어버렸다. “일산에 뭐 볼 게 있다고요.” 일산에 있는 호텔로 호캉스를 간다고 했을 때 일산 출신인 친한 후배가 이런 말을 한 이유다. 참고로 우리 부부는 여름에는 좀처럼 휴가를 떠나지 않는다. 대신 비수기인 5월과 9월에 실내 수영장이 있는 호텔에 한 사나흘쯤 묵으며 더위를 식힌다. 숙소 2층에 있는 러닝머신에서 땀을 쭉 빼고 보통은 같은 층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1층 로비에 가서 빙수를 먹는 그 사나흘은 1년을 버티는 데 꽤나 큰 힘이 된다. 마침 ‘경기 북부의 유일한 5성급 호텔’이라는 일산의 한 호텔에 다녀올 기회가 생겨 십수 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일산을 찾았다.
일산은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복합상업건물인 라페스타는 텅텅 비어 영화 '반도'의 세계처럼 변해 있고, 호수공원은 정글로 변해 야생 조류의 점령지가 된 건 아닐까? 팬데믹으로 얼어붙은 지난 2년 사이 혹시 우리가 묵을 호텔 역시 좀비화한 건 아닐까?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허튼 걱정 따위는 재빨리 떨쳐버릴 수 있었다. 사람이 너무도 많아 얼리 체크인을 하면서도 줄을 서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말이라고는 하지만, 엄청난 인파가 호텔에 몰려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흠칫 놀랄 정도였다. 그리 크지 않은 수영장은 입장료가 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더위를 식히며 태닝을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루프톱에 있는 호텔 수영장에서 저 멀리 쇼핑센터 원마운트에 있는 워터파크와 아쿠아리움 인근을 오가는 인파들이 보였다. 나는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광경을 보면 흥분하곤 한다. 그리고 그곳에 끼지 못하면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서운한 감정에 침울해지곤 한다. 이렇게 멋진 도시에서 호텔에만 있기는 너무도 아깝다며 아내를 설득했고, 결국 내가 아는 일산을 다시 만나러 거리로 나섰다.
아케이드 형태의 원마운트 초입에서부터 우리는 놀랐다. 한 베이커리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빵을 먹고 있었고, 그 건너에 있는 칼국수집에는 무더위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손님들이 야외 테이블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다. 이벤트 광장에서는 고등학교 댄스 동아리들이 나와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유명 안무를 추고 있었으며, 무대 앞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이 무척 어색했다. 그건 아마도 평생 그렇게 다양한 연령대의 동네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 수백 명(솔직히 말하면 한 150명 정도였던 것 같다)의 사람들 중에는 갓난 아기들이 정말 많았다. 인파 안팎으로 유모차가 한 서른 대쯤 주차돼 있었다.
그날 오후의 하이라이트는 이벤트 광장을 지나쳐 조금 더 가 만난, 노래하는 분수대였다. 마치 일산의 모든 부모들이 약속이라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듯 광장 가득 아이들이 꼬마 괴수처럼 소리를 지르며 뛰놀고 있었다. 지면에 있는 작은 바닥 분수대에는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흠뻑 젖은 채 물줄기와 씨름을 했다. 어른들은 분수대 인근의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아이들을 지켜보며 맥주를 마시고, 수박을 먹었다. 찾아보니 노래하는 분수대와 인근의 광장을 합하면 1만5,000평이 넘는다고 한다. 그 거대한 광장이 순전한 기쁨과 휴일의 여유로 가득 차, 처음 느껴 보는 따스한 희열을 선사했다.
일산에 뭐 볼게 있냐던 친구는 아마 이런 모습을 평생 당연하게 봐 오며 살았을 것이다. 그에게 그런 광경은 특별한 것이 아닐 것이다. 신도시의 쾌적함과 이제 곧 서른 살을 바라보는 올드 타운의 커뮤니티 결속력이 일산에는 동시에 보인다는 점. 그 사실 역시 당연했을지 모른다. 부모들이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아이들이 분수대의 물줄기에 젖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광경이 새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맞아요. 일산 사람들은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이 대단해요.” 1999년에 태어난 한 친구가 말했다. “전 부모님이 일산에 차린 신혼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친구들도, 삶의 기반도 전부 이곳에 있어요. 취업을 하더라도 일산에 살고 싶고 결혼해서도 일산에 살고 싶어요. 이곳이 나의 도시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십대 후반인 우리 회사의 한 후배 역시 일산에서 오래 살았다. “아직 일산에 사는 제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이 결혼해서도 일산에 살고 싶어하더라고요. 그렇게 도시를 사랑하다니 좀처럼 흔하지 않은 일이죠”라고 말했다. 내게도 그들처럼 고향으로 여길 만한 마을이, 혹은 도시가 있을까? 태어난 곳은 보광동이고, 가장 오래 산 곳은 화곡동이지만, 그 어느 곳도 내 고향이라 느끼지는 않는다.
신도시는 언젠가부터 조롱거리가 됐다. 먼 통근 거리를 감수하고라도 쾌적한 주거 환경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도시. 신도시 스타일을 패러디하는 유튜브 콘텐츠들이 생기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서울 못 살아 신도시에 산다”는 얘기 역시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다. 그러나 일산 사람 대부분은 이 말에 콧방귀를 뀔 것이다. “호수공원은 일산의 심장이죠. 그런데 일산에는 호수공원 말고도 단지마다 작은 광장이 많아요. 그곳에서 마치 중국인들이 아침에 태극권을 하듯 동네 사람들이 모여 에어로빅을 하기도 하죠. 라페웨돔(라페스타와 웨스턴돔)이나 원마운트에 있는 이벤트 광장에선 주말이나 저녁에 중고등학생들이 공연을 하고요. 그런 작은 활동들이 일산을 고향으로 만들죠.” 후배가 말했다.
나는 세련된 사람들이라면 비웃을 수도 있는 이런 작은 일들이 많은 이들의 삶과 기억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호수공원이 일산의 심장이라면, 호수공원에서 열리는 꽃박람회는 하트(심장)에 깃든 영혼이라고 후배는 말했다. 내년 봄엔 반드시 소노캄 고양에 묵으며 꽃박람회를 구경하고 노래하는 광장을 지나 지난 5월 입장에 실패한 라페스타의 인기 꼬치구이집을 찾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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