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얼마 전 선고기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매주 다양한 사건을 선고하는데 공교롭게 그날은 산재 사건이 3건 있었습니다. 사망 사건은 하나같이 비통하지만 한 사건이 특히 마음 아프더군요. 한 어머니 때문입니다. 출근할 때마다 볼 비벼주던 다정한 아들을 잃고, 숨 쉬고 걷는 것, 어느 것 하나 미안하지 않은 것이 없는 죄인이라며, 여태껏 한 생명이 이토록 소중한 줄 미처 몰랐다고, 아들이 이젠 꿈에도 나타나지 않아 너무 그립다고 말하는 어머니, 아들을 잊지 못해 매일 아들을 보러 가지만, 그래서 매일매일 아들이 죽는 어머니였습니다. 다음 글은 그 사건의 양형 이유 중 일부입니다.
꽃에도, 하늘에도,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이 어여쁘고 귀한 아들과 형제를 잃은 가족들께, 조의를 표합니다. 고인을 황망하게 앞서 보내고 자신들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견디기 힘들다는 유족들께, 그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럼에도 살아남은 우리는, 또 이렇게 서로를 부축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 애통하게 돌아가신 고인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사건 역시 위험의 외주화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보다 우리 사회의 안전 불감증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반복되는 산재 뒤에는, 타인의 생명에 대한 권태와 비정한 이익형량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아프게 직시해야 합니다. 각종 사고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노동자의 생명이 일주일의 납품기한, 보름의 공기(工期), 500만 원의 도급금액, 누군가의 저녁 약속의 무게에도 미치지 못한 것을 흔히 봅니다. 이 정도 돈을 아끼려고, 고작 이런 것들을 지키려고, 한 사람을 그토록 쉽게 사지(死地)로 내몬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위험의 외주화가 비난받는 이유는, 외주화 그 자체라기보다 외주화를 거치면서 위험이 덤핑 거래되고, 목숨이 파격 세일됨으로써, 생명의 가치가 점점 축소되고 급기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의 소중함에 무감하도록 만든다는 점에 있습니다. 위험의 외주화는 안전의 개인화와 죽음의 관음화를 조장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도 자신과 자기 가족 문제가 아니라면, 그저 지나가는 뉴스거리로만 소비하고 맙니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을 방관하고 때론 이를 연료 삼아 나아가는 사회는 정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이 누군가에게 상대적 안도감과 위안을 주는 세상 역시 희망이 없습니다. 모두가 행복하려면 불행한 누군가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더라도,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최선을 다해 서로 지켜준다면 산재를 줄일 수 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고,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며, 알지 못하면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소중한 생명이 심연으로 사라져 갑니다. 누군가의 걱정과 관심과 의문이 사람을 살립니다. 사업주의 걱정이 안전모가 되고, 동료의 의문이 위험을 감지하는 레이더가 되며, 시민들의 관심이 안전망이 되고 법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의 배후가 되어야 합니다. 눈앞의 화살이 나를 비켜간다고 환호할 것이 아니라, 그 화살이 누군가의 등을 꿰뚫을 수 있음을 알고 화살이 향하는 자리를 끝까지 주시하고 경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신호수입니다.
이 사고로 잃은 것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인과 연관된 사람들의 숫자만큼, 남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고인의 모습만큼, 무수하게 많은 생명을 잃었습니다. 단독의 죽음은 없습니다. 모든 죽음은 복수입니다. 모두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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