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와 분열의 교훈

입력
2022.08.0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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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일 비자민 연립정부

1993년 8월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인 호소카와 내각 각료 기념사진. 왼쪽 6번째가 호소카와 모리히로, 7번째는 하타 쓰토무.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3년 8월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인 호소카와 내각 각료 기념사진. 왼쪽 6번째가 호소카와 모리히로, 7번째는 하타 쓰토무.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3년 8월 9일 일본 미야자와 내각이 총사퇴하고, 비자민 비공산 연립정권인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했다. 1955년의 보수합동, 즉 두 보수정당 자유당과 민주당이 통합하며 출범한 자민당이 38년 만에 처음 권좌에서 밀려났다.

1988년 리크루트 뇌물사건으로 자민당은 55년 체제 출범 이래 최악의 궁지에 몰렸다. 정치 불신과 선거제도 개혁 등의 숙제를 안고 출범한 도시키 내각은 하지만 당내 파벌 간 이견으로 우왕좌왕하다 1991년 말 미야자와 내각에 바통을 넘겼다. 그리고 이듬해 8월 5억 원대 불법 정치자금 비리인 사가와큐빈 사건이 터져, 최대 파벌인 다케시타파 출신 당시 자민당 부총재 가네마루 신이 퇴장했다. 그 와중에 당내 소장 개혁파 의원들이 하타 쓰토무를 중심으로 새로운 파벌(일명 하타파)을 형성, 당 전체가 격랑에 휩싸였다. 내각 2인자였던 와타나베 미치오 부총리 겸 외무대신이 건강을 이유로 사임했고, 후임으로 천거된 하타는 그 자리를 고사하며 개혁 요구의 강도를 더 높였다. 자민당 압박에 야당인 사회당과 공명당이 가세했고, 미야자와 내각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1993년 6월 야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됐지만 미야자와는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 카드로 정면 승부를 걸었다. 그 승부수에 하타파 등 당내 개혁파 의원들이 집단 탈당해 신생당을 결성했다. 7월 치러진 제40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무려 52석을 잃은 223석으로 과반(266석) 확보에 실패했고, 사회당이 70석, 신생당이 55석을 차지했다. 신생당 등은 자민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거부하고 사회당 등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과 손을 잡고, 일본신당 대표인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추대했다.

하지만 호소카와 내각(8개월)과 뒤이은 하타 내각(2개월) 역시 사가와큐빈 스캔들 불똥과 개혁에 대한 이견으로 이내 붕괴했고, 사회당 등이 자민당과 다시 손을 잡으면서 비자민 연립내각은 10개월 만에 끝이 났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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