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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단지' VS '경복궁 후원 보존'... 청와대 활용 뜨거운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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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성 논설위원이 노동ㆍ건강ㆍ복지ㆍ교육 등 주요한 사회 이슈의 이면을 심도 깊게 취재해 그 쟁점을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코너입니다. 주요 이슈의 주인공과 관련 인물로부터 취재한 이슈에 얽힌 뒷이야기도 소개합니다.
1,000년간 통치자의 전유 공간이던 청와대 권역이 국민 품으로 돌아오면서 활용 방안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대통령실 이전을 공약한 윤석열 대통령의 3월 대선 승리와 5월 청와대 개방을 거치면서 움텄던 제안들이 다소 중구난방이었다면, 지난달 문화체육관광부가 '살아 숨 쉬는 청와대'를 모토로 내건 정부안을 발표한 뒤로는 한층 진중한 숙의 단계로 나아간 양상이다.
청와대가 복합적 성격을 지닌 공간이란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가깝게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역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공간이고, 시야를 넓히면 고려·조선 왕정의 중심 무대이자 일제강점기 치욕이 서린 역사적 공간이다. 경내 주요 건물을 미술 전시, 야외 공간을 공연 무대로 활용하자는 문체부의 '복합문화예술공간' 조성안은 청와대의 다면성 가운데 '현대성'에 방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역사성'을 중시하는 문화재계·학계는 현장 조사와 보존 작업을 우선적으로 진행하자고 제언한다. 개방된 청와대를 핵심축으로 삼아 서울을 문화·역사 도시로 고도화하자는 관광업계와 지자체 목소리도 작지 않다.
정부는 향후 청와대 활용에 있어 문체부가 주도하면서 문화재청, 대통령실 관리비서실과 협의하는 구도로 교통 정리를 한 상황이다. 문체부가 이달 장애인문화예술축제, 가을 청와대 소장 미술품 특별전을 통해 복합문화예술공간 구상을 실현할 예정인 가운데, 문화재청과 대통령실이 기관 자체 입장을 정리할 연말쯤 보다 명확하고 종합적인 청와대 활용 방안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문체부는 지난달 21일 박보균 장관의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청와대 활용 구상을 밝혔다. △청와대 아트 콤플렉스(complex·단지) △대통령 역사문화공간 △고품격 수목원 △문화재 보존 등 4가지 방안이다. 박 장관은 지난달 28일 국회 상임위 업무보고에서 "지난 4월부터 3개월 이상 각계 의견을 들었다"며 5월 정부 출범에 앞서 대통령인수위원회에서 활용안 논의가 시작됐음을 내비쳤다.
가장 무게가 실린 방안은 청와대 본관과 관저, 영빈관, 춘추관, 녹지원 등을 근현대 미술 전시공간으로 구성하겠다는 '아트 콤플렉스' 조성 계획이다. 박 장관은 "그동안 청와대는 풍광의 정적 형태로 국민에게 다가갔다"며 "다음 단계는 보다 기품 있고 보다 신선하고 보다 흥미롭게 국민 품속에서 살아 숨 쉬는 청와대"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문체부 구상에 따르면 본관과 관저는 원형 그대로 관리하되 본관 1층, 관저의 본채 거실과 별채 식당을 상설 미술 전시장으로 구성한다. 건축 원형을 보존하면서 내부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모델이라는 설명이다. 영빈관은 미술품 기획 전시장으로 운영한다. 기획전 사례로는 청와대 소장품, 이건희 컬렉션, 국내외 유명 작가전이 제시됐다. 춘추관은 시민소통공간으로 쓰되 2층 브리핑실은 민간에 전시 공간으로 대여한다. 이달 말 개막할 장애예술인 미술 특별전이 그 시작이다. 녹지원은 조각공원 및 야외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아울러 본관 대정원, 영빈관 1층은 국악, 클래식, 대중음악 등 공연예술 무대로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된다.
대통령 역사문화공간은 본관과 관저, 구 본관 터를 중심으로 조성된다. 장관 설명에 따르면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삶' '역사 속 대통령의 결단의 순간' 등에 관한 자료를 스토리텔링과 곁들여 전시한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역대 대통령 가족으로 자문위원단도 구성할 계획이다.
일부 구체적 계획이 포함되긴 했어도, 문체부의 청와대 활용안은 일종의 마스터플랜으로 볼 수 있다. '문화예술공간' '역사문화공간' '수목원' 등 활용 방향을 큼직하게 구획하고, 각각의 세부 계획은 관계 기관과 민간 전문가의 중지를 모아 세워 나간다는 게 정부 구상이다.
문체부는 지난달 26일 보도자료에서 "청와대 활용 방안의 짜임새와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문화재청과 대통령실 관리비서관실과 긴밀히 협의할 계획"이라며 "이 방안이 민관 협력의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민간 전문가들의 경험과 지혜도 계속 모아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문체부 관계자도 "청와대 소장품 대다수가 미술품이다 보니 초반 논의가 시각예술 위주로 이뤄진 측면이 있을 뿐, 기본 방향은 다양한 콘텐츠로 채워지는 복합문화예술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와대는 회화 위주로 작품 6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문체부가 도록을 제작하고 있다.
민간에서 청와대 활용 논의가 가장 활발한 곳은 문화재·역사 학계다. 이들은 청와대 일대가 유서 깊은 궁궐터라 보존 가치가 높다는 입장이다. 고려 시대 서울은 남경으로 개경(개성)·서경(평양)과 함께 3경으로 불리는 중심지였다. 숙종은 개경에서 남경으로 천도를 염두에 두고 1104년 별궁을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청와대 터였다.
조선은 건국 직후 한양으로 수도를 옮겨 경복궁을 건설하면서 청와대 권역을 후원으로 조성했다.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경복궁을 1868년(고종 5) 중건하면서 후원도 되살렸다. 이강근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는 "지금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경복궁과 떨어져 있지만, 원래 후원은 경복궁의 일부"라며 "과거시험 장소인 문무대도 후원에 있어서 고종은 재위 기간 500번 가까이 친림해 문제 출제부터 합격자 발표까지 주재했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왕이 휴식하는 '뒤뜰'이 아니라 국정의 핵심 기능을 수행하는 장소였다는 얘기다.
학계는 청와대 권역에서 역사적 고찰, 문화재 보존을 위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강근 교수는 "청와대는 그간 대통령경호실 주관으로 몇 차례 조사가 이뤄졌을 뿐 전문가, 학자에게 개방된 적이 없다"며 "청와대의 역사성과 장소성에 대한 조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인근 경복궁 흥복전 구역을 2008년 조사했을 때 고려 왕궁 유적으로 추정되는 기와, 벽돌이 다수 발굴된 전례도 조사 필요성에 힘을 싣는다.
미술계는 '청와대 미술관'이 논의의 출발점이 되자 반색하는 분위기다. 지난달 25일엔 관련 단체 55개 공동 명의로 정부안을 환영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단체들은 "미술관, 시각문화시설을 중심으로 한 복합문화공간화 계획은 (청와대가) 선진국이라는 국격에 맞는 문화공간으로 환골탈태하는 일"이라며 "청와대를 포함한 문화예술 클러스트가 대한민국의 상징적 문화예술기관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미술계에선 대안 논의도 활발하다. 청와대를 '국립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이 그중 하나다. 1850~1960년대 근대기 국내 미술품을 집중적으로 소장·전시하는 국립기관이 없다는 문제의식 아래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보유한 관련 작품을 한데 모으자는 것이다. 제안 단체는 원형 보존이 필요한 본관과 관저 대신 영빈관(조각), 춘추관(수묵채색화), 여민관(기획전), 경호동(유화) 등을 장르별 전시실로 사용하자는 세부 구상도 밝혔다. 박물관 전문가 사이에선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나 국립고궁박물관을 청와대 건물로 이전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청와대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높이고 경복궁 복원사업의 효율도 높이는 일석이조 효과가 있다는 논리다.
관광업계의 관심도 높다. 청와대를 주변 관광자원과 연계하면 시너지 효과가 클 거란 기대 때문이다. 당장 서울 남북으로 북악산-청와대-경복궁-광화문광장-청계천-덕수궁-남대문, 동서로는 청와대-북촌-인사동-창덕궁-종묘-대학로로 이어지는 '역사문화 관광벨트'를 조성하자는 제안이 활발하다. '청와대 관광'의 경제 효과에 주목하는 지자체들도 논의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길기연 서울관광재단 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관광업계의 숙원이 서울에 새로운 랜드마크를 조성하는 일이었다"며 "청와대 개방은 서울의 랜드마크를 넘어 한국의 관광 지형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문헌 종로구청장은 "청와대를 포함한 문화관광 벨트를 조성해 종로구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는 윤석열 대통령 취임 당일인 5월 10일부터 문화재청이 관리를 맡아 예약제로 개방되고 있다. 문체부는 연내 문체부가 직접 주도하는 2단계 개방 체제로 전환한다는 방침이다. 시간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가을로 예정된 청와대 소장 미술품 특별전이 2단계 개방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문체부 협의 기관인 문화재청과 대통령실도 관련 과제를 수행 중이다. 문화재청은 조만간 청와대 권역에서 '경복궁 후원 기초조사'에 착수한다는 계획 아래 조사기관과 연구용역 계약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재 조사는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로 나뉘는데 이번은 지표조사에 해당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올해 11월 말이나 12월 초까지 경복궁 후원 권역에서 도면화, 역사적 고증, 실측 작업이 이뤄질 것"이라며 "현장 통제가 필요한 작업이 아니라서 청와대 개방 프로그램과 병행해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실은 지난달 25일 민간 전문가로 '청와대 관리·활용 자문단'을 꾸렸다.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을 단장으로 역사문화, 예술·콘텐츠, 관광·도심 활성화 3개 분과에 각각 5명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이달 2일엔 현장을 시찰하고 '국민화합' '대한민국 발전과 역사성' '과거와 현재의 조화' '대중성 있는 예술콘텐츠' 등을 활용 방향성 설정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대통령실 관리비서관실은 자문단 의견을 반영해 연말까지 청와대 활용 로드맵을 만들고 문체부와 협의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문화재 기초조사, 대통령실 로드맵 마련이 완료되는 연말쯤 보다 진전된 청와대 활용안이 마련될 전망이다. 현행 1단계 개방 실무를 맡은 문화재청 청와대국민개방추진단도 연말까지 관리 업무를 맡기로 잠정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 안팎에선 문체부의 복합문화예술공간화 방안의 골격을 유지하되, 문화재 조사 결과 등에 따라 일부 건물이나 구역에 등록문화재 등록 등 보존 조치가 취해질 거란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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