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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다 '쑥' 빠지고, 건물 기둥 '뚝' 부러지고... "싱크홀 안전지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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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강원도 양양군 낙산해수욕장 인근에서 멀쩡한 편의점이 순식간에 두 동강 나며 폭삭 주저앉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싱크홀(sinkhole)' 때문이었는데요. 외신의 '해외토픽'에서나 접했던 일이 국내에서 벌어지니까 사람들이 정말 깜짝 놀랐죠. 사고 발생 전에 조짐이 보여 편의점 직원과 주변 상인들이 대피해 사상자가 없던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언론에선 바로 옆에서 진행되고 있던 호텔(지하 6층, 지상 20층 규모) 신축 공사와의 연관 가능성을 제기했는데요. 국토교통부는 지난 4일 사고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하고 유사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중앙지하사고조사위원회'를 꾸렸습니다.
이처럼 황당한 싱크홀 사고는 처음이 아닙니다. 2015년 2월 20일 서울 용산구 용산역 맞은편 한강로 주상복합건물 신축공사장 앞에서 발생한 사고가 대표적인데요. 공사장 앞에 정차한 시내버스에서 내린 20대 커플이 공사장 펜스 쪽 인도에 발을 딛는 순간 땅이 내려앉아, 3m 깊이 싱크홀로 빠지며 갑자기 사라진 겁니다. 사고 장면은 버스에 설치된 카메라에 생생히 잡혔죠. 다행히 두 사람은 사고 발생 17분 뒤 119대원들에 의해 구조됐습니다. 허리와 다리, 목을 다쳐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다행히 치명적 부상은 입지 않았죠. 구멍은 겉에서 보면 가로·세로 1.2m 정도(1.44㎡)였지만 지하로 내려가면서 점점 폭이 넓어져 최대 너비가 5m나 됐다고 해요.
또 지난해 12월 31일에는 경기도 고양시 마두역 인근의 건물 지하 3층 주차장 기둥이 무너지면서 건물 앞 도로에 싱크홀이 발생했습니다. 건물 붕괴가 우려돼 입주민과 인근 건물 시민 등 300여 명이 긴급 대피했죠.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고양시는 붕괴 우려에 대비해 건물 사용 중단 명령을 내렸죠. 이후 지하 1층에서 지상 7층까지 입주한 음식점과 병원, 학원 등 78개 사업장의 영업이 중단돼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흔히 '땅꺼짐', '싱크홀'이라고 불리는 지반침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땅이 가라앉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지반침하는 주로 물(지하수)에 잘 녹는 석회암 토양에서 발생해서 화강암과 편마암 지대가 대부분인 우리나라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라고 인식됐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매립지 조성을 통한 신도시 건설, 지하공간의 과도한 개발, 상하수도 등 지하시설물의 노후화 등에 따라 도심지 곳곳에서 지반침하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해요.
국회 입법조사처가 국토교통부의 자료를 인용해 올해 1월 펴낸 '도심지 지반침하의 원인과 대책'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2017~21년) 동안 서울, 광주, 부산 등 도심지를 비롯해 전국에서 1,229건의 크고 작은 지반침하가 발생했습니다. 연간 250건가량, 즉 사흘에 두 번꼴로 발생했네요. 통계상으로만 보면, 적어도 우리나라는 더 이상 싱크홀 안전지대가 아닌 셈이죠.
보고서는 "전체 인구의 91.2%가 전체 면적의 16%에 불과한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어 지반 침하로 인한 붕괴사고가 대규모 인명 및 재산 피해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지반침하가 발생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크게 ①연약지반이 충분히 다져지지 않은 경우 ②지하수의 흐름이 바뀌어 빈 공간 '공동(空洞)'이 생긴 경우 ③상·하수관로 손상으로 누수(漏水)가 발생하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연약지반에서 발생하는 지반침하는 주로 매립지(埋立地)에서 나타납니다. 매립지 조성에 사용한 흙이 단단하게 다져지지 않으면 지반이 서서히 가라앉게 되고, 시설물의 하중이 더해지면 침하 속도가 빨라지는 거죠. 연약지반의 지반침하는 넓은 지역에 걸쳐 오랫동안 진행되므로, 매립지 중앙부터 다수의 시설물에서 비슷한 유형의 피해 현상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지하수 흐름이 바뀌어 생기는 지반침하는 전철 도로 상가 주차장 등 대규모 시설을 지하에 조성할 때 많이 발생합니다. 지상공간의 개발이 점차 한계에 이르러 다수의 시설물을 지하에 건설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지하수의 자연적인 흐름이 바뀌고 지하에 공간(공동)이 생기는데, 지하수가 버티던 지반의 하중을 공동이 견디지 못해 무너지면 지반침하가 발생하는 겁니다. 지하수의 흐름 변동으로 발생하는 지반침하는 연약지반에서 발생하는 경우에 비해 사전징후를 알기 어렵고, 침하가 급격히, 깊게 발생할 수 있어 위험도가 높다고 합니다.
앞서 소개한 2015년 2월 용산 신축공사장 싱크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당시 서울시와 한 달가량 조사한 전문가들이 "터파기 공사 중 현장에서 흘러나온 지하수가 흙막이(공사장과 주변 사이의 지하수 흐름을 차단하는 막)를 빠져나와 공사현장 바깥쪽으로 나가면서 흙이 함께 빠져나갔고, 이때 생긴 지하동공이 커지면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분석한 겁니다.
마지막으로 상·하수관로 누수로 인한 지반침하는 도심지 개발 당시 설치한 관로가 노후화되거나, 굴착공사 중 매설된 관로를 손상시킬 때 발생합니다. 주택, 상가, 공장 등과 인접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피해가 생각보다 클 수 있습니다.
국토교통부가 2017년부터 2021년 6월까지 발생한 1,176건의 지반침하 발생 원인을 조사해보니 매설물 손상이 680건(하수관로 538건, 상수관로 97건, 기타매설물 45건)으로 가장 많았고, 다짐(되메우기) 불량 203건, 공사 부실 87건(굴착공사 41건, 상·하수관공사 26건, 기타매설공사 20건) 등의 순이었습니다.
지난해 말 마두역 상가건물 지하 기둥 파손과 땅꺼짐도 정밀안전진단 결과 부실공사 때문이었다고 해요. 말뚝(pile) 대신 매트(mat) 공법으로 변경해 바닥 기초가 시공되면서 지반이 구조물 압력을 견디는 지내력(地耐力)이 약해졌고, 하층 벽체 콘크리트 강도가 설계기준에 미치지 못해 지하 3층 기둥이 파손된 겁니다. 또 지반 높이를 인접 건물보다 10m 낮게 조성하고, 지하층 한쪽 외벽공사를 하지 않아 하루 20톤 이상의 지하수가 스며들었고, 건물을 받치고 있는 지반에도 다량의 지하수가 유입돼 곳곳에 틈이 생겨 약화하자 건물 앞 땅꺼짐 사고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됐죠.
그렇다면 주요 기반시설과 다중이용시설이 위치한 지하공간을 효율적으로 개발하면서도 싱크홀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할까요?
전문가들은 "지하공간통합지도, 지하수 기초조사 등 '지하공간 기초자료'를 구축할 것"을 주문합니다. 싱크홀 발생의 주요 원인인 지하시설물과 지하수 관리를 철저히 하자는 취지입니다.
국토교통부도 이 작업을 진행 중인데 속도가 더딥니다. 지하정보활용지원센터에 따르면 지하에 매설된 가스관 상하수도관 통신선 등 15가지 정보를 3차원 지도로 구현하는 지하공간통합지도 구축사업은 2015년부터 5년간 290억 원(기본계획기준)을 투입했는데, 8대 특·광역시, 수도권 17개시의 지하공간통합지도 구축만 완료했습니다. 국토부 관계자는 "올해 말까지 이번 사고가 발생한 양양군을 비롯해 전국 77개 군 단위 지역을 대상으로 완료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1990년 시범사업으로 시작해 30년 넘게 추진 중인 '지하수 기초조사'도 아직 조사를 완료하지 못했습니다. 국회 보고서는 "167개 지역 중 지난해 말까지 151개 지역(90.4%) 조사를 완료했지만, 조사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거나 대규모 지하개발 사업이 추진된 지역은 지하수 수량과 흐름의 양상이 변동됐을 가능성이 커 신뢰도 확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다른 싱크홀 원인인 부실공사를 줄이는 것도 급선무입니다. 건설업계 관계자 A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싱크홀도 대부분 사전에 징조가 있고, 건설사나 관할 관청이 제대로 조치를 취해야 함에도 그렇지 않아 발생하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털어놨습니다. 이번 강원 양양군 호텔 신축공사 현장 인근 싱크홀로 인한 편의점 건물 붕괴사고도, 이전부터 수십 차례 크고 작은 땅꺼짐이 있어 주민들이 민원을 넣었다고 하죠.
특히 A씨는 요즘 건축자잿값 인상으로 인해 시행사와 시공사 간 다툼이 잦아지며 부실공사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그는 "시공사가 실제 건축해보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비용이 더 들어가 사업을 발주한 시행사에 사업비를 더 올려달라고 얘기하면, 거절하며 버티는 시행사가 있어 양측이 많이 다툰다"고 귀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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