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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란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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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헌법과 법률을 무너뜨리면 국헌문란, 국가기강을 어지럽히면 국기문란이고 사회윤리를 흐리게 하면 풍기문란이다.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한 폭력은 내란죄로 처벌된다. 대법원은 전두환 군부 세력이 주도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이후 정권장악 과정을 국헌문란으로 규정해 처벌했다. 바바리맨 같은 공공 장소에서의 음란한 행위역시 풍기문란이고 공연음란죄로 처벌된다. 그런데 국기문란은 법전에도 없어 법률 용어가 아니라 정치권 용어에 가깝다.
□ 그런 탓에 국기문란은 정권, 정치세력, 정치인마다 다른 의미로 사용해왔다. 전두환 군부세력은 ‘학생데모를 배후 조종한 재야인사들’을 국기문란자로 체포했다. 군부에게 김대중 김영삼은 국기문란자, 김종필은 부정부패자였다. 박근혜 정부는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실종, 측근 정윤회 문건유출 사건, 우병우 민정수석 감찰내용 외부유출을 국기문란으로 단정했다. 이어진 수사와 재판에서 3건의 국기문란은 모두 인정받지 못했다.
□ 윤석열 대통령은 ‘국기문란’이란 말을 두 차례 사용했다. 지난 6월 초유의 경찰치안감 인사번복, 7월의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신설에 반대한 전국 경찰서장 회의가 대상이다. 대통령과 장관의 강한 질타에 경찰청장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런데 인사번복은 국무조종실 조사에서 행안부 파견 치안정책관(경무관)의 실수로 드러났다. 대통령이 파견경찰 실수를 국기문란으로 정한 경위는 미스터리다. 경찰서장 회의 참석자들에 대해선 수사가 아닌 감찰이 진행 중이다.
□ 이재명 민주당 의원이 3일 자신을 둘러싼 수사와 관련해 ‘국기문란’을 꺼냈다. 그는 “검찰과 경찰이 정치에 개입하고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은 심각한 국기문란 행위”라고 했다. 정치인 수사에는 특별히 해석될 만한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범죄수사를 국기문란으로 비판하는 것은 공감하기 어렵다. 털어도 깨끗하고 결백하면 될 일이다. 되돌아보면 우리 정치에서 힘이 있는 자신에게 반대하면, 불리하면 그 상대를 국기문란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대의 권위적 용어가 국기문란인 셈이다. ‘국기문란’이 많을수록 문란(紊亂)한 세상인 것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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