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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기처럼 똑같이 그려야 미술 영재일까…예술가 자질에 대한 신화

입력
2022.08.02 04:30
15면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2> 미술영재와 예술가

사진처럼 잘 그리는 아이의 그림 앞에 다른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한마디씩 던진다. "와! 너 정말 잘 그린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그릴 수 있지?"라면서. 아이들 미술시간에 종종 마주하는 광경이다. 누군가가 제록스처럼 사물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잘 그렸다며 감탄한다. 유치원 아이가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척척 푸는 걸 보면서 놀라워하는 것과 비슷하다. 분명히 또래에 비해 남다른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남다른 능력이 있다고 해서 아이가 반드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은 '성공하는 예술가의 조건'과 무관하다는 얘기다.

직관형 아이 A vs. 감성형 아이 B

A는 똑같이 따라 그리기를 매우 잘하는 아이다. 정확한 비례와 비율로 사물을 그려내고 어린아이들이 대부분 빠뜨리는 귀까지 묘사한다. 그런데 '상상하여 그리기' 시간만 되면 온몸을 뒤틀고 힘들어하면서 "선생님, 저 뭐 그려요? 이거 그려도 돼요? 저거 그려요?"하며 끊임없이 어른의 지시와 허락을 요구한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힘들어 한다.

B라는 아이는 정반대다. "지금부터 상상해서 그리기 해보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눈동자에서 레이저를 뿜으며 종이 가득 무엇인가를 마구 채운다. 대체 무슨 상상 끝에 이런 그림을 그렸나 싶을 정도로 어른들이 잊어버린 신비로운 마법의 세계를 마구 쏟아 내기도 한다. 그런데 '정물 소묘' 시간이면 인상부터 쓰면서 계속 딴짓을 시전한다. 진득하게 집중하는 일이 쉽지 않은 B는 결국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기 일쑤다.

아이 A와 아이 B 중에서 누가 미술영재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미술영재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하다. 즉, 두 아이에게 맞는 미술의 영역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럼 질문을 바꾸어 보자. A와 B 중에서 커서 화가가 될 소질이 있는 아이는 누구일까? 이 또한 정답이 없다. "A 성향과 B 성향이 모두 있으면서 꾸준하게 그림을 그려내고 무언가를 만드는 아이"라고 답하는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미술 시장 속에서 살아 남는 예술가가 되는 일은 어느 쪽 성향의 미술영재였던 것과는 무관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호퍼가 9세에 그린 스케치(1891년). The Arthayer R. Sanborn Hopper Collection Trust.

에드워드 호퍼가 9세에 그린 스케치(1891년). The Arthayer R. Sanborn Hopper Collection Trust.


알베르트 뒤러가 13세에 그린 자화상(1484년). 위키미디어

알베르트 뒤러가 13세에 그린 자화상(1484년). 위키미디어


폴 클레가 4~6세경 그린 '우산 쓴 여자'. 위키미디어

폴 클레가 4~6세경 그린 '우산 쓴 여자'. 위키미디어


A 성향의 아이들은 논리 직관력이 뛰어나다

사물을 정확히 그리는 것은 수학으로 치면 연산과 비슷하다. 시각정보 처리능력과 공간지각력이 뛰어난 이 아이들은 대상을 놀랍도록 똑같이 묘사한다. 그러나 단순히 연산을 잘한다고 수학이라는 학문에서 권위자라고 부르지 않듯이, 미술도 마찬가지다. 기술적인 부분은 입 벌어지게 잘하는데, 막상 "상상해서 무언가를 그려봐"에서 힘이 빠지는 아이들은 예술적 창의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자신이 잘할 수 없는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에 어려워하는 것이다.

B 성향의 아이들은 감성 표현력이 뛰어나다

사물을 똑같이 따라 그리라고 하면 쩔쩔매면서 짜증을 내지만, 제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라면 정신없이 질주하는 아이들이 있다. 극단적인 B형 아이들은 학교 숙제를 제시간에 끝내는 일도 쉽지 않다. 주어진 시간 내에 완성하고 마무리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예술적 창의력이 넘치게 많은 게 아니라, 일단 '에너지' 자체가 넘치게 많은 쪽이다. 물론 전두엽이 제자리를 완성해가는 만 10세 이후로는 조금 차분해지기도 하지만 선천적으로나 기질적으로 통제와 규율을 따르는 것을 어려워한다.

두 어린이가 지난 2월 18일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 전시에서 체험 행사에 참여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두 어린이가 지난 2월 18일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 전시에서 체험 행사에 참여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사실 우리는 이런 A와 B 성향을 조금씩 다 갖고 있다. 그러나 유달리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들도 있다. A와 B의 극단성은 타고난 기질적 특성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이런 극단적 성향은 어떤 직종과 무관한 개인적 성격 특성에 불과하다. 훗날 A와 B가 화가가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다른 성향의 예술가들이 두 명 있을 뿐이다.

이런 두 성향의 A와 B는 어린 시절 미술수업 중에 “미술영재”라는 말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릴 때 "그림 잘 그렸다"는 소리 들었다고 모두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미디어에 나오는 어린 미술영재가 미술대학 입시에 실패하거나 이후 예술가가 되는 길을 포기하는 사연을 접하면 "저런 미술영재가 입시 앞에 무너지다니! 이런 천재를 말살하는 교육정책이 문제"라며 비판하기 바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예술가에 대한 신화' 때문이다.


예술가에 대한 신화

오늘날 전 세계 모든 초등학교 교실에서 예술활동(Art-making)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 어려서 접한 예술에 대한 이미지는 평생 갈 정도로 강력하다. 초중고를 거치며 접했던 미술교과서를 떠올려 보자. 최근에는 STEM(과학·공학 등을 접목한 융합인재교육)과 같은 창의적인 미술 활동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위대한 예술혼'이 담겼다는 과거의 예술 작품들을 반복해 만난다.

예술가와 예술에 대해 교실 안에서 보고 들은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은 대중 매체다. 소설, TV 드라마, 영화 등 접촉 장벽이 낮은 대중적인 장르를 통해서 예술가에 대한 신화는 더욱 커졌다. 예를 들어, 영화 '모차르트'의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와 비운의 경쟁자 살리에리가 있겠고, 또 영화 '서편제'나 '취화선'의 예술혼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시대를 앞선 천재 예술가들을 범접할 수 없는 광인(狂人) 또는 뮤즈의 소리를 듣는 신선(神仙)의 경지로 상정한 채, 우리 현실의 삶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로 느껴온 편이다. 아무래도 배 나온 회장님 같이 살이 찐 화가보다는 한쪽 귀를 스스로 잘라냈다던 고흐처럼 퀭한 눈빛의 고뇌하는 화가가 더 예술가답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미술이 공교육의 한 과목이 된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대중매체를 자유로이 접하고 과거 그 어떤 때보다 낮은 문턱에서 예술을 만나고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이 오히려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한 오해를 야기하기도 했다. 예술로 들어가는 문턱이 낮아지면서, 자본이 유입되고 거대하고 다층적인 예술 시장이 형성됐다. 시장이 작동하는 실제 상황에서는 예술과 예술가의 의미는 가변적이다. 이 모든 것이 불과 100년 정도에 일어난 일이다.

네덜란드의 경제학자이자 화가인 한스 아빙은 자신의 책 '왜 예술가들은 가난해야 할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예술에 대한 신화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신화의 주변에는 정의로운 기운이 감돈다. (중략) 예술에 대한 신화는 재능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예술세계에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신화를 숭배하는 예술가들은 언젠가 공정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렇듯 유독 재능이 성공의 요건이 된다고 믿는 분야에서 공정성의 문제는 또 다른 갈등과 절망을 낳기도 한다.

미술영재에 대한 오해

미술영재, 음악신동, 스포츠천재 등 우리 주변에 예술영재들이 많다. 어려서 특별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 아이들이 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공정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여기에는 묘한 착시 현상이 존재한다.

선 긋기부터 시작해 형태를 잡는 법, 명암을 표현하는 법, 그림자를 내는 법 등 그림 한 장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틀을 익히는 데는 생각 이상으로 '엉덩이 힘'이 필요하다. 태어나자마자 스케이트로 공중 3회전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다만, 특별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일수록 기본적인 틀을 익히는 속도는 더 빠르다. 만약 '기본적인 시간과 노력'을 사용했는데도 기초가 늘지 않는 미술영재, 음악신동, 스포츠천재가 있다면 둘 중 하나다. 기본적인 시간 투자와 노력이 아직 부족했거나, 선천적 성향의 어떤 특별함을 지나치게 한 분야의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타고난 천재'라는 신화에 기대어 우리는 이 기본적인 태도를 쉽게 간과한다. 앞서 보았던 A와 B 두 아이가 직업적으로 안정적인 예술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A에게는 좀 더 과감하고 자유로운 발상이 필요하고, B에게는 좀 더 차분하게 절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어쩌면 A와 B는 예술가라는 직업 대신 다른 일을 할 때 그 개인의 삶이 더 풍성하고 행복할 수도 있다. 그들이 가진 특별한 재능은 얼마든지 다른 영역에서도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술가의 신화에 집착한 우리가 특별한 재능을 키우지 못한다고, 지금의 교육 제도를 서둘러 비판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가 11세에 그린 토르소 습작(1892년). 피카소 미술관, 바로셀로나

파블로 피카소가 11세에 그린 토르소 습작(1892년). 피카소 미술관, 바로셀로나


피카소가 58세에 그린 딸 마야, 'Maya with boat(1939년)'. 개인소장

피카소가 58세에 그린 딸 마야, 'Maya with boat(1939년)'. 개인소장

"구상(具象) 없는 추상(抽象)은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훈련과 연습을 통해 구상 표현의 기초 실력을 갖춘 화가가 훗날 추상 미술로도 박수를 받는다. 피카소(1881~1973)는 뒤틀리고 어그러진 아동미술과 같은 추상화를 내놨지만, 어려서 완벽한 형태의 사물을 묘사하고 그려낼 줄 알았다 한 편으로는 평생을 예술가로 살면서 나름의 명성과 지위를 가진 피카소였기에 그의 11세 때 스케치를 보며 "역시 미술영재!"라고 여기겠지만, 엄밀하게는 더 어린 나이에 그만큼 그려내는 아이들은 우리나라에도 많다. 요컨대 재능은 충분조건이지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군가의 특별한 재능과 재주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재능, 어떤 영재성이 빛을 보지 못했다고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다. 그러나 서둘러 희망할 필요도 없고 미리 절망할 이유도 없다.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우리에게 예술 작품으로 전달된 그림들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한다. 재능을 넘어서는 진득한 노력과 성실한 훈련으로 축적된 세월, 그 내공이 없는 예술 작품은 없기 때문이다.


송주영 미술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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