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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살기 위해 떠났다"… 조선소 호황에도 인력 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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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조선 하청노조에서 안 도와줬으면… 돈은 없지, 월급 못 받았지, 병원에 입원해가 하반신 마비돼있지. 솔직히 내는 자살하고, 집사람은 도망가고, 애들 고아원 가지 않았겠나, 이런 섬뜩한 생각까지 해요, 내가."
조명석(가명·43)씨에게 조선소는 '탈출'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자신은 죽고 없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곳이다. 10여 년을 조선소에서 일한 숙련노동자였던 그는 지금은 육상 플랜트 분야에서 일한다. 아직 가족들과 울산에 살지만, 결단코 조선소로 돌아갈 일은 없다고 했다.
한국 조선업이 다시 호황기에 접어들었다. 수주 건수만 보면 그렇다. 그런데 2015년 말 13만3,346명에 달했던 조선업 하청 생산직 인력은 5만 명 밑으로 떨어지고, 떠난 인력은 돌아오질 않는다. 정부는 근본대책 없이 외국인 인력을 늘리겠다고 한다.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은 조선소에서 일하다 떠난 일꾼들에게서 조선소의 악몽을 들어봤다. 사람이 죽으면 "죽었네" 하고 마는 곳, 산업재해 신청을 하려 하면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곳, 하루 15시간 일하고 월 260만 원 받는 곳, 소변볼 시간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곳. "내가 만든 배가 바다에 뜬 순간의 뿌듯함"을 기억한다는 노동자는 "조선업의 인력난은 자업자득"이라고 했다.
조명석씨는 2003년부터 2017년까지 울산 ○○중공업 본공(1차 사내하청 상용직) 취부사로 일했다. 취부사는 선박 블록들을 제작도면에 따라 정확한 자리에 가조립하는 일. 중량 장비를 써서 크고 무거운 자재를 다루다 보니 신체적 업무 강도도 센 데다, 도면 해독 등 전문성도 요구된다.
10년 가까이 고된 일을 하니 덩치가 크고 단단한 체격의 명석씨에게도 사달이 났다. 2013년 어느 날 허리의 4, 5번 디스크가 완전히 터졌다. 하반신이 마비됐다. 혼자서는 앉지도, 걷지도, 일어날 수도 없었고 옆으로 눕는 것도 못했다.
"그런데도 산재를 안 해준대요. '니 산재 해봐야, 평생 중공업(조선소)에 발 못 들인다.' 이래 겁을 줘요. 모르는 사람은 겁나서 하겠습니까, 산재. 그래가 병원비라도 달랬더니, '병원비 없다. 니 허리 아픈데 왜 회사가 책임을 지냐' 이러더라고. 월급도 안 주고, '일하는 게 있어야 주지' 이라면서. 근데 내 식구들 먹여 살릴 생활비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슬하의 세 아이 나이가 각각 7세, 5세, 3세였을 때였다. 2010년 페인트 유독가스 흡입으로 숨쉬기조차 어려운 폐 염증이 생겼을 때, "지금 출근 안 하면 짤린다"는 소리 듣고 참았으나, 이번엔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막막한 심정에 처음으로 노조의 문을 두드렸고, 그 도움 덕에 산재 인정을 받았다.
산재 요양이 끝나고 복귀해 1, 2년을 더 일했다. 하필 조선업 불황의 시작이었다. 한때 실수령 300만 원 후반까지 찍었던 월급은, 100만 원 밑으로 뚝 떨어졌다. 2016년 수주 절벽에 '일감이 없다'며 무급 휴가가 이어졌다. 회사 몰래 밤에 대리운전도 뛰었다. 다친 몸을 이끌고 죽어라 투잡을 뛰었지만 결국엔 신용불량자가 됐다.
버티고 버티던 명석씨는 결국 2017년, 조선업계를 떠난 다른 많은 이들처럼 육상 플랜트 분야로 업을 옮겼다.
"솔직하게 말해갖고, 일 강도는 중공업(조선소)에 비해서 게임이 안 돼요. 힘든 정도가 진짜 반도 안 돼요. 근데 월급은 두세 배를 받거든요. 신용불량 됐다가 (조선소) 나와서 몇 년 만에 그 돈 다 갚고, 거기 있을 땐 진짜 사람이 살 수가 없어요."
그는 아직 가족들과 울산에 산다. 하지만 조선소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변에 조선소 나온 사람들 얘길 들어봐도, 차라리 퀵 배달을 하든 주유소 알바를 뛰든 하지. 다른 데 가면 일도 덜 힘들고, 돈도 몇 배 주는데 누가 돌아가겠습니까? 일하다 사람이 죽어도 별 반응 없이 그냥 '죽었네' 이라고 조금 있다가 다시 일하고. ○○중공업뿐 아니라 어느 중공업이든 사람 목숨을 갖다가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데…"
그 역시 젊은 시절, 같은 현장에서 일하던 이의 죽음을 목격했다. '피 치우는 일'을 맡았던 끔찍한 기억이 생생하다. 최근 약 5년(2016~2021년 10월)간에도 조선소에서 총 88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협력업체(하청업체) 사망자가 77%(68명)였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파업 사태에 대한 소회를 물었더니, "보면서 기가 찼다"고 했다. "'참을 만큼 참았다. 공권력 투입하겠다'는 소리를 하던데. 왜 그렇게까지 목숨 걸어가며 파업하는지 얘기는 들어봐야 할 것 아닙니까."
조선업 인력난에 대해 명석씨는 "일당 올려주고, 위험의 외주화(위험 업무가 하청 노동자에게 집중되는 현상)만 막아도 다 해결되지 않겠냐"고 했다. 정부의 외국인 인력 확대 방침에 대해선 "기술 유출돼갖고, 우리나라 기술력이 약해지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왜 조선소를 떠났나'라는 질문에 오세동(32)씨는 "이거 진짜 할 말 많다"고 했다. 스물셋의 여름, 전선을 다루는 결선 작업 헬퍼(조수)로 조선업계에 뛰어들어 9년간 일하고, 올해 초 '탈출'했다. 그는 '다시 조선소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세동씨는 말했다. "9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선 노동자들은 노예입니다, 노예."
원청과 하청업체 관리자가 강조하던 '시종시간 준수'는 악몽이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고는 오전·오후 각 10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10분 내에 화장실이나 흡연 등 볼일을 모두 해결하려면 턱없이 모자랐다. 세동씨는 "간이 화장실 한 칸짜리에 보통 15~20명 정도 대기하니 쉬는 시간 10분이 금방 끝났다"라고 전했다. 1분이라도 일찍 쉬었다가는 관리자들에게 '사진'이 찍혀 불이익을 받았다. 세동씨는 "사진이 찍히면 하청업체로 페널티가 가는데 이런 페널티는 결국 노동자에게 내려오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비나 눈이 와도, 찌는 듯한 더위에도 쉬는 시간은 하루 20분. 여름에는 작업공간이 달궈져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지만 폭염으로 인한 추가 휴식은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또 "(다른 회사의) 타워크레인 사고 때 노동자들이 정해진 시간보다 10분가량 이르게 쉬다가 사고가 났다고 문제를 삼더라"고 어이없어 했다. 당시 타워크레인이 덮쳐 근처에서 쉬던 노동자들을 포함해 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원청은 노동자들이 '시종시간'을 지키지 않고 좀 더 쉬다가 피해가 컸다고 밝혔다.
더구나 정작, 근무 '시(始)작' 시간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오전 8시가 작업 시작인데 아침 조회는 오전 7시 30분이나 45분부터 배 위에서 진행됐다. 낮 12시부터인 점심시간에도 중간 조회를 해야만 했다. 세동씨는 "중간 조회를 마치고 배에서 나와 식당에 도착하면 12시 15분이고,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다 보면 30분이 가까워왔다"면서 "부랴부랴 식사를 마치고 작업장인 배로 12시 50분까지 돌아가 다시 또 오후 조회 후 작업을 바로 시작했다"고 했다. 물론 이런 조회 시간은 '공짜 노동'이었다.
"업무 강도도 조선소에 비해 덜하고, 돈도 더 줘, 점심이나 휴식 시간은 더 긴데 퇴근 시간은 빠른 육상공사로 다들 떠날 수밖에 없죠." 세동씨도 현재 건설현장에서 일한다. "(조선소는) 업무 강도에 비해 돈이 안 돼요." 조선업 위기에 많은 노동자들의 임금이 삭감됐고, 이후 복원 없이 6~7년을 지나며 최저임금에 가까운 시급을 받는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자신이 직접 전등을 다는 작업을 했던 배가 시운전을 위해 해가 진 바다에 떴던 순간을, 세동씨는 아직도 기억한다. 어둑어둑한 바다를 가르는 배의 환한 불빛은 그에게 작지만 분명한 뿌듯함을 안겼다.
세동씨는 "나는 비록 자신이 없어 떠났지만 파업에 나선 분들도 그렇고, 현장에서는 다들 조선업에 자부심을 갖고 몸을 바치시는 분들"이라고 했다. 그는 "조선업의 인력난은 자업자득"이라며 "노동자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현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소 가보셨어요? 거긴 21세기가 아니에요. 조선시대에 지주에게 착취당하던 소작농들의 현장 그 자체예요."
대형 조선사 1차 협력(하청)업체를 통해 12년간 파워그라인더(파워공)로 일하던 김영호(가명)씨는 최근 굴삭기 기사로 전업했다. 20만 원이던 일당이 4만 원까지 깎이던 2019년, 영호씨는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처음으로 작업 거부에 나섰고 이후 노동조합에 가입해 각종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올해 3월쯤 조선소를 떠나게 됐다.
파워공은 조선소에서 페인트칠을 하기 전 철판의 녹·이물질을 제거하는 직종이다. 철판 블록과 블록을 용접해 만든 배가 바닷물을 오가다 보면 용접한 부위의 안팎이 모두 녹슬게 되는데, 손전등 불빛 하나에 의지해 용접 부위의 녹을 닦아내는 게 파워공의 업무다.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해 오후 10시에 퇴근한 파워공이 한 달에 받는 돈은 260만 원 남짓에 그쳤다.
사고도 잦았다. 영호씨는 "녹을 제거할 때 쓰는 공구인 에어 그라인더는 드릴처럼 회전하는데, 쇠에 잘못 부딪혀 튕기거나 살에 닿아 데이는 일이 흔하다"고 설명했다.
배의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오가는데, 발판(족장)은 부실했다. 그는 “최근 몇 년 새 용접 부위를 찾아다닐 때 지지대 삼는 발판이 부실해서 일어나는 사고도 잦아졌다”고 말했다. 울퉁불퉁하게 설치된 발판에 걸려 넘어지거나, 발판이 무너지면서 추락하는 식이었다. 영호씨는 “원래 발판 작업이 숙련공의 업무인데, 이마저도 열악한 처우로 인력난에 시달리면서 비숙련자가 채우고 있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산재 신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영호씨는 “산재 처리를 하면 협력업체에 페널티가 들어온다는 이유로 심하게 다치더라도 공상 처리(회사에서 보상)까지가 최선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7인치짜리 그라인더 하나가 7, 8㎏ 되는데 그걸 들고 하루에 10시간 넘게 일을 하면 몸이 안 아플 수가 없다”며 “그런데 산재 신청이라도 하면 업계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는 걸 아니까 다들 참고 일한다”고 덧붙였다.
영호씨는 현재 굴삭기 기사로 파워공 시절 번 돈의 3분의 2 정도를 번다. 하지만 “조선소로 돌아가긴 싫다”고 못 박았다. 영호씨는 “지금 하는 일은 좀 더 배우다가 내 굴삭기를 사서 숙련자가 되면 처우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라도 있다”며 “근본적인 노동 환경이 개선되지 못하면 숙련공이 다시 조선소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남 거제의 한 조선소에서 사내 하청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윤경필(가명·31)씨 역시 불의의 사고로 2020년 4월 조선소를 떠났다. 경필씨는 조선업계에 첫발을 들였을 땐 전남 목포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노동자를 그나마 '사람 대우' 해준다라는 소문에 거제로 옮겼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사람 대우는 없었다. 원청인 조선소와 1차 협력(하청)업체를 거쳐 재하청업체(물량 팀장) 아래 물량 팀원인 경필씨는 산재에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경필씨는 조선소에서 높은 곳에서의 작업을 위해 발판을 설치·해체하는 족장공으로 1년 넘게 지냈다. 경필씨는 "고소 작업을 위해 리프트카에서 자재를 내리던 중 차가 작업이 끝난 줄 알고 출발하는 바람에 넘어졌다"라고 사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상급자인 소장, 직장에게 사고를 알리면서도 "지금은 허리가 쑤시는 정도라 내일이 되어봐야 상태를 알겠다"고 보고했다. 다음 날 도무지 일하지 못할 정도의 통증이 찾아왔고, 이를 전했으나 돌아온 건 "어제 이야기를 하든가 하루 지나서 아프다면 어떻게 하나"라는 핀잔이었다.
1차 하청업체에서는 경필씨가 업체 소속이 아니라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는 하청업체와 계약을 맺은 팀장 1인이 사업자 등록증을 낸 재하도급 업체 소속이었다. 대형 조선사들은 1차 협력사와 도급 계약을 맺을 때 재하도급을 금지한다고 계약서에 명시하지만, 현장에서는 하청업체가 물량팀이나 아웃소싱 등에 공정별로 일감을 주는 일종의 '편법적 재하도급'이 이뤄진다. 이런 이유로 하청업체는 경필씨에게 "당신은 팀장의 직원이지 우리 직원이 아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계속되는 통증에 결국 조선소 일을 그만뒀다. 하청업체 총무는 퇴사 소식에 경필씨를 불러 "원래는 안 되지만 병원비와 2주치 임금을 공상 처리해 주겠다"라고 선심을 썼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필씨는 "조선소를 그만두고 전화도 해보고 찾아도 가봤지만 하청업체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조선업계를 떠난 경필씨는 충북 청주의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지만, 사고로 인한 허리 통증이 여전해 정기적으로 출근하지는 못한다. 이날도 몸이 아파 일을 나가지 못했다면서도 경필씨는 "하는 일 자체는 비슷하지만 육지의 건설 현장이 훨씬 낫다"라고 단언했다.
경필씨가 출근하는 건설 현장에서는 안전관리자들이 계속 쫓아다니며 안전수칙 위반 사진을 찍고, 위반 시 바로 퇴출한다. 그는 "만약 육지의 건설 현장에서 조선소처럼 일한다면 당장 페널티를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소에서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노동자 본인도 하청·원청업체 모두 안전을 딱히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 경필씨는 "가스통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데도 별 지적 없이 넘어갔을 정도"라면서 "고용노동부에서 나온다고 예고하면 그때만 반짝 안전 수칙을 지키는 식"이라고 상황을 전했다.
경필씨는 "저는 조선업계를 떠났지만 가정을 꾸리고 거제에 터를 잡은 지인들이 있기에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이어 "이런 안전불감증에 대한 해결 없이는 조선소 인력난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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