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볼 결심

입력
2022.07.26 22:00
27면
올해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헤어질 결심'이 7월 13일 100만 관객을 넘기자 박찬욱 감독과 주연 배우 탕웨이, 박해일이 감사 인증샷을 찍었다. CJ엔터테인먼트

올해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헤어질 결심'이 7월 13일 100만 관객을 넘기자 박찬욱 감독과 주연 배우 탕웨이, 박해일이 감사 인증샷을 찍었다. CJ엔터테인먼트

'헤어질 결심'을 보고 '다시 볼 결심'을 했다.

다시 보니 안개가 걷혔다. 주제곡 가사처럼 안갯속에 눈을 떴다. 디테일이 보이고, 주인공의 속마음이 읽히고, 배우의 연기가 보이고, 대사가 음미되고, 모호했던 의미가 정리되고, 미처 생각 못했던 게 생각나고, 음악이 들리고, 복선이 보이고, 복잡한 줄거리가 꿰맞춰진다. 결말은 알고 있으니 보는 내내 여유로웠다. 아, 영화 이야기를 쓰려면 적어도 두 번은 봐야 하겠구나, 생각했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고 박찬욱 최고의 영화로 찬사와 기대를 받은 영화다. 그런데 막상 개봉하니 100만 관객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그러더니 25일 150만 관객을 넘어서는 뒷심을 발휘하며 잘나가고 있다. 이른바 'N차 관람'이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한다.

뭐, 같은 영화를 돈 주고 두 번 이상 볼까. 두 번이면 3만 원인데. 좀 지나서 TV에서 틀어줄 때 보면 될걸. 다시 보기라면 '주말의 명화'밖에 몰랐던 중장년은 이해하기 어렵다.

N차 관람이라는 새로운 트렌드가 극장가에 본격 불기 시작한 건 대략 2016년쯤부터다. '불한당'(변성현 감독)과 '아가씨'(박찬욱 감독)와 '곡성'(나홍진 감독)이 그 시작이었다.

한국형 누아르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불한당'은 평단의 높은 평점에도 불구하고 3주도 안 돼 종영됐다. 100만 명도 채우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자칭 '불한당원'이라는 열혈팬들이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모금을 해서 단체관람 상영관을 통째로 대관했다. 두 달여간 20여 도시에서 재상영회를 열었다.

2016년 영화 '아가씨'를 111회나 본 사람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인증샷. 서울에 사는 30대 여성이었다.

2016년 영화 '아가씨'를 111회나 본 사람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인증샷. 서울에 사는 30대 여성이었다.

'아가씨'는 어떤가. 이 영화에 홀린 N차 관람객(CGV 기준) 중 1위는 무려 111회. 2위는 77회, 3위는 68회로 모두 20대, 30대 여성이었다. '아가씨'의 N차 관람 평균 횟수는 4.8회였다. 이어 '아수라' '독전' '캐롤' '내 사랑' '어벤져스' 등이 그랬다.

N차 관람은 극장 풍경도 바꾸었다. 재관람률이 8.6%나 된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화를 보면서 떼창하는 '싱어롱 상영관'을 별도로 마련했다. 영화 주인공처럼 차려 입고 보는 열혈팬들의 모임, 영화 대사를 따라 하는 상영회, 관람 후 토론회 등 참여형 또는 놀이문화형 관람 트렌드가 생겨났다. SNS에는 '○번째 관람' 인증샷을 올리는 게 유행이 되었다. 제작사들도 'N차 관람으로 천만 가자'라고 부추긴다.

과거의 영화마니아들이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섭렵했다면, 지금은 자기 취향에 맞는 특정 작품에 집중적으로 열광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아이돌 팬덤'에 이어 '영화 팬덤'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N차 관람 대열에 끼면서 사소한 깨달음이 왔다. 좋아하는 노래나 감명 깊었던 책은 언제든 다시 듣고 보는데 영화는 왜 그런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오마주와 추앙의 대상이 내게도 생겼다는 게 왠지 싫지 않았다. 무언가 채워진 느낌이었다.

사람도 자주 만날수록 진면목이 보인다. 살아오면서 내 안목을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디 사람뿐이랴. 한 번 가본 곳도 다시 가면 달라 보인다. 주변의 물건도 그렇다. 찻잔 하나도, 꽃나무 하나도 유심히 다시 보면 다르게 보이지 않던가.

내친김에 3차 관람까지 해볼까. 내 나이가 어때서? '덕후'니 '폐인'이 뭐 꼭 젊은애들만의 특권인가.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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