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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제일가는 정원을 가진 동네…'궁세권'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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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일요일에 집 앞을 산책하는데, 웬 서양인 커플이 빨래터 앞에서 콸콸 흐르는 개울물을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네 관광정보센터 같은 곳에서 나눠주는 안내책자를 보고 찾아온 게 분명했다. 무더위에 골목 끝까지 걸어오느라 땀에 흠뻑 전 두 사람이 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들의 눈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설마...... 이게 다는 아니죠?”
그렇다. 우리 동네에는 빨래터가 있다. 힙한 세탁소 이름, 이런 거 아니고 그냥 진짜 옛날 빨래터. 창덕궁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과 통하는 이 빨래터는 조선시대에 청계천과 더불어 도성 최고의 빨래터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담장 아래로 흐르는 소하천에 궁궐 쌀 씻은 물이 섞여 빨래가 잘 된다고 믿었다나. 뭐, 한때는 쌀뜨물이 흐르는 마법의 빨래터였을지 모르나 이제는 애써 찾아온 관광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초라한 개울가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원서동의 입지도 이와 비슷하다. 지리상 유서 깊은 북촌에 속하기는 하나, 굳이 멀리서 찾아올 만큼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다. (나름 명물로 치는 게 앞서 말한 빨래터다.) 덕분에 좋은 점도 있다. 바로 동네가 놀랄 만큼 조용하다는 것. 옆 동네인 계동은 주말이면 나들이객으로 북적북적한데, 계동길 끝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정문에서 원서고개로 넘어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음소거 버튼이 꾹 눌린다. 사위는 고요하지, 보이는 건 낡은 빌라들뿐이지, 이러니 다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처럼 두리번거리다 황망히 발길을 돌리는 것이다. 요컨대 원서동은 북촌의 김밥 꼬투리 같은 동네다. 북촌 구경에 배부른 사람들이 ‘이왕 온 김에 여기도 한번’ 하고 김밥 꼬투리 집어먹듯 별 생각 없이 들르는 곳. 그리고 2018년, 이사할 집을 찾던 남편과 나는 별 생각 없이 김밥 꼬투리를 덥석 집어먹고 마는데……
집을 택할 것인가, 동네를 택할 것인가. 당시 우리의 고민은 대략 이랬다. 햇볕 한 점 안 드는 다세대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우리는 '해가 듬뿍 드는 새집'에 대한 열망을 야금야금 키워가던 터였고, 전세 계약이 끝날 무렵 기다렸다는 듯 서울 변두리의 신축 아파트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구식 빌라에 비하면 부동산에서 보여준 그 집들은 대궐이나 다름없었다. 하이글로시로 마감한 주방은 도자기처럼 광이 났고, 거실은 당시 마땅한 장소가 없어 서재에서 번갈아가며 요가를 하던 우리가 함께 양팔을 수평으로 쭉 뻗는 ‘전사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문제는 대궐 밖이었다. 힘없는 묘목 몇 그루가 가뭄에 콩 나듯 박힌 내부 조경과 임대 안내문이 붙은 창백한 상가들. 신도시 대단지 아파트 특유의 그 삭막한 풍경을 보고 나면 마음 한편이 짜게 식었다. 단지 입구에서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이동하며 출근 시간을 가늠하다 보면 철제 펜스로 가림막을 세운 공사 현장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렇듯 분진이 피어오르는 길을 걸을 때면 이 삭막한 풍경조차 순식간에 갈아엎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창밖으로 새로운 건물이 불쑥 솟아나는 경험은 이미 이전 신혼집에서 충분히 경험한 터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넓고 반짝이는 새집이 이 모든 불안을 갈음할 만큼 가치 있는 걸까?
두 달 후, 나와 남편은 어딘지 모르게 '보니 앤 클라이드'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장님 부부와 함께 창덕궁 돌담길을 걷고 있었다. "젊은 부부가 운이 좋네. 이 동네는 원래 매물도 잘 안 나와." 부동산의 실질적 주인인 듯한 보니 사장님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별로 안 젊어요"라고 대답하려는데 뒤따라오던 클라이드 사장님이 "으응..." 하고 말을 흐렸다. 마치 우리 같은 뜨내기 손님에게 이런 귀한 매물을 보여줘도 될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야트막한 돌담 위로 가지를 드리운 느티나무가 바람결에 쏴아, 몸을 흔들었다. 청명한 하늘과 궁궐 담장의 대비가 그날 따라 산뜻했다. 남편과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꼭 맞잡았다. 초여름 오후의 나른한 공기 속에 까치 울음소리와 야채장수 아저씨의 확성기 소리가 번갈아 울려 퍼졌다.
40년 넘게 운영 중이라는 '럭키 세탁소'를 끼고 주택가로 들어서자 언덕을 따라 4~5층짜리 양옥들이 촘촘히 늘어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990년대 말 건축 규제 완화와 함께 우르르 들어섰다는 그 빌라들은 모두 창덕궁 숲을 정원처럼 내려다보게 창이 나 있었다. 보니 사장님이 ”운동 삼아 걷기 딱 좋은 거리“라고 말한 집은 가파른 언덕 끝,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현관에 들어선 순간, 거실 창 너머로 창덕궁의 녹음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그 모습에 우리는 산 정상에 오른 듯 그간의 고생을 싹 잊고 말았다. 우리의 감격을 눈치챈 클라우드 사장님이 "다음 주에 아들 오면 보여주려고 아껴놨던 집인데..." 하며 또 한번 말을 흐렸다. 그러자 보니 사장님이 얼른 거들었다. "다음 주? 아이고, 장담하는데 이번 주 안으로 나갈걸."
내가 이들의 티카타카에 넋을 빼는 사이, 남편은 집주인이 눈치를 주건 말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노후한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 "원서동에서 이 정도면 새집이에요." 보니 사장님이 답답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창덕궁이 지척이라 동네 전체가 고도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어 애초에 새 건물을 올리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했다. 높은 건물이 아니면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만큼 북촌의 다른 동네에 비해 집세가 저렴하고 창덕궁 숲이 옆에 있어 공기도 좋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적어도 당분간 우리가 사는 집 앞에 거대한 포크레인이 돌아다닐 걱정은 안 해도 될 터였다. 그렇게 우리는 대궐 같은 새집 대신 대궐 옆의 헌집을 택했다. 그러니까 집이 아닌 동네를 택한 것이다.
“이름부터 예쁘잖아?” 나는 집에 놀러온 친구들에게 자식 자랑하듯 이렇게 말하곤 했다. 원서동(苑西洞)이 창덕궁 후원의 서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 내가 사는 언덕 쪽은 조선시대 궁인이었던 내시와 상궁들의 터전이었으며 그 시절에는 '원동'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내가 궁궐 옆 동네의 삶을 하나 둘 배워가는 동안, 부동산 시장에서 ‘궁세권’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내게 궁세권의 참맛을 가르쳐준 사람은 우리나라 1세대 조경가인 정영선 선생님이었다.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면서 그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무슨 대화 끝에 “선생님, 저 원서동 살아요”라고 말하자 장시간 인터뷰로 피로해하던 선생의 얼굴이 어린애처럼 환해졌다. 그는 “서울에서 제일 아름다운 정원을 가졌네요!”라며 자기 일처럼 즐거워했다. 그날 궁궐 담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선생이 말한 ‘가지다’라는 동사를 오래 곱씹었다. 그 동사는 나로 하여금 내가 사는 동네의 인프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좋은 학군과 대형마트가 아닌, 수백 년 된 궁궐과 조용한 돌담길이 주는 가치에 대해.
이후 나는 '동네를 집으로 만드는 법'을 즐겁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좁은 집이 갑갑할 때면 아침 일찍 입장 시간에 맞춰 창덕궁에 들어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손에 쥐고 인정전의 너른 마당과 낙선재, 부용지 일원을 따라 걸으며 봄에는 분홍 팝콘처럼 터지는 홍매화를, 가을에는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단풍을 가득 눈에 담았다. 이게 다 우리집 정원이다 생각하면 그저 흐뭇했다.
요즘 같은 계절에는 집앞 고희동미술관의 서늘한 마룻바닥을 우리집 거실처럼 맨발로 누비기도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고희동 화백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8년에 직접 설계하고 41년간 생활한 근대식 한옥으로, 그가 생전에 쓰던 화실을 비롯해 안방, 사랑채 등 공간마다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가볍게 둘러보며 더위 식히기 딱이다.
동네 초입에 있는 고 김수근 건축가의 옛 '공간 사옥' 건물은 집으로 치면 영감으로 넘쳐나는 서재 같은 곳. 1층에 있는 한옥 카페 '프릳츠'는 건물 전체가 담쟁이로 뒤덮이는 초여름에 가야 제맛이다. 건축가 김수근이 살아있을 때 이 건물 지하에 소극장이 있었는데, 당시 뉴욕에 살던 백남준 작가가 관객으로 와서 앉아 있기도 했다고. 이런 곳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세기에 남을 명작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럴 때는 나의 단골 작업실인 '동네커피'로 이동한다. 창덕궁 담벼락길에서 1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주인이 직접 굽는 스콘이 정말 맛있다. 글이 막힐 때는 현대건설 앞에 있는 원서공원을 한 바퀴 돌기도 한다. 200년 된 회화나무와 게이트볼을 즐기는 노인들이 있는 이 작은 공원에서 내가 아는 한 소설가 언니는 지금의 남편과 첫 포옹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뒤로는 나무 한 그루도 심상찮게 보여 산책의 재미가 늘었다.
창덕궁과 계동 사이에 좁고 길쭉하게 자리한 원서동은 앞서 말했듯, 그 면적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북촌의 다른 동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인지 택시를 타고 "원서동 가주세요" 하면 알아듣는 기사가 거의 없다. "거길 원서동이라고 해요?" 하고 다들 신기해할 뿐. 돌이켜보면 나는 이 동네의 소박한 면적과 약간의 익명성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건 정말 '우리 동네'라는 감각을 주니까. 원서동에 살며 계동에서 '병천순대국'을 운영하는 장옥경씨는 2021년 서울시 한옥정책과에서 엮은 책 ‘북촌의 시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냥 제가 사는 동네잖아요, 여기는. 뭐 거창하게 생각하거나, 북촌이라서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가 지금 내가 사는 동네란 게 중요한 거죠. 그러다 보면 한옥에 자연스레 관심을 두게 되는 거고, 이 동네 안에 있는 것들에 애정이 생기는 거죠. 이 동네 안에 다 있어요. 모든 것이." 내가 사는 동네를 내 집처럼 아끼는 마음. 그 마음을 나는 원서동을 통해 배워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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