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들과 구릉으로 둘러싸인 경기 평택시의 한적한 대지에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4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이 각지고 견고해 보이는 건물에는 반전이 숨어있다. 건물 주변으로 잘 가꿔진 산책로와 조용히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휴식공간, 아기자기한 텃밭이 있고, 동굴 같이 아늑한 내부 정원에는 계수나무가 여럿 자라 포근한 분위기를 풍긴다. '별빛이 비추는 집'이라는 뜻의 장기 노인요양시설, '성광원(星光院)'이다.
지난해 11월 완공된 건물은 건축면적 692.32㎡(약 210평), 연면적 2,942.64㎡(약 890평)이다. 1층에는 치매나 중증노인질환자를 돌보는 데이케어센터(주야간보호센터)가 있고, 2층부터 4층에는 치매나 중풍 등 노인성 질환을 앓아 돌봄이 필요한 노인들이 거주한다. 평균 나이 90세의 고령 어르신 50명이 얼마 남지 않은 일생의 마지막 순간을 담담하게 쌓아가는 '생의 마지막 집'이다.
인생의 마지막 챕터를 마주하는 집
건축주는 사회복지법인 성광원 대표인 이설희(66) 원장이다. 성광원은 1991년 이 원장의 부친인 고 이명호씨가 자기 소유의 땅 2만6,400㎡(약 8,000평)을 기증해 세운 복지재단 산하 양로원으로 출발했다. 2007년부터 이 원장이 맡아 요양시설로 운영해오다 건물이 택지개발로 수용되면서 이전했다. '어르신들이 살던 집에 온 듯 편안하게 지내다 가실 순 없을까'로 확장된 생각은, '이왕이면 전문가에게 맡겨 노인을 위한 제대로 된 집을 짓는 게 어떨까'에 이르러 구체화했다.
이 원장은 "어르신들은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보내니 주거공간이 곧 삶이나 마찬가지"라며 "좋은 공간에서 좋은 삶도, 좋은 돌봄도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 돌봄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고, 자신도 어느덧 노년의 길에 접어든 이 원장이 토지 보상금 전부를 건축에 쏟아붓는 뚝심으로 그렸던 집의 모습은 간명했다. "'내 집' 처럼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잔존 능력을 끌어내 스스로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 노인 맞춤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원장이 홀로 막연하게 생각했던 모습은 바우건축사사무소의 권형표(48), 김순주(50) 소장을 만나 덜어지고 더해지면서 윤곽이 잡혔다. 핵심은 '어르신의 시선으로 바라본 집'이었다. 권 소장은 "병원 혹은 호텔 같은 요양원은 관리자, 공급자 중심의 공간"이라며 "전형적인 요양시설의 틀에서 벗어나는 데 설계의 주안점을 뒀다"고 했다. 기능적으로 꼭 갖춰야 하는 필수 시설 외에는 노인요양시설에 통용되는 '병원다움'을 입히거나 '관리가 쉬운 것'으로 분류되는 요소들은 일단 배제하고 봤다. "어르신들의 행동, 생활 패턴을 고려하는 게 최우선이었고, 그다음 오랜 경험에서 나온 돌봄의 지혜와 노하우를 녹여내는 데 공을 들였죠."
중정을 따라 걷는 내부 산책로
그렇게 풀어낸 것이 '원형 정원'이다. 노인요양시설은 최대한 많은 병상을 확보하기 위해 중복도(복도를 중앙에 두고 양쪽에 방을 배치하는 형식)를 만드는 게 흔하다. 요양원을 얘기할 때 길게 늘어선 복도 양옆으로 배치된 병실에서 누워지내는 노인들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에 반해 성광원은 내부를 원형으로 비워두고 주변으로 둥근 복도를 만들었다. 빛과 바람이 통하는 지름 13m의 정원을 전층이 공유함으로써 사시사철 편안하고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다. 이는 복도를 자주 배회하는 요양원 노인의 특성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권 소장은 "요양원의 일상이란 창으로 흘러드는 바깥 풍경을 보면서 가만히 있거나 좁은 복도를 따라 왕복 운동을 하는 게 전부"라며 "건물 가운데 원형의 정원이 있어 충분히 보호받으면서도 자연광을 느끼며 걸을 수 있는 순환 동선이 생긴다"고 말했다.
건축가의 바람대로 원형 정원은 구성원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공간이 됐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천숙경(55) 사회복지사는 "어르신들이 방을 나섰을 때 제일 먼저 밝고 환한 정원이 보인다"며 "방에서 나와 좀 더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요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복도는 휠체어 두 대가 지나갈 정도로 여유롭다. 건물 기둥 모양이나 각 방문 손잡이의 색깔이 다르고 귀퉁이마다 다른 휴게 공간도 마련됐다. 자신의 위치를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한, 작지만 세심한 배려다. 성광원에 머무는 노인들의 80~90%는 치매 환자다.
1인실, 노인의 삶을 존중하는 방법
'요양원=4인실'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독립 공간에 주력한 것도 성광원의 특징이다. 통상 요양시설은 수용 인원에 따라 정부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방들이 대개 4인실 위주다. 이에 반해 성광원은 1인실, 2인실, 4인실을 각각 16실, 22실, 4실로 배치했다. 독립적인 침실과 화장실이 딸린 1인실이 전체의 40%를 넘는 반면 4인실은 10%에 불과하다. 어르신의 프라이버시와 라이프 스타일을 존중하고 개인별 생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원장은 "4인실을 사용하면 어르신들이 외롭지 않게 보일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공동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불면, 마찰 등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며 "당장은 재정적 어려움을 감수하더라도 더 좋은 돌봄 환경을 위해선 1~2인실이 기본이 돼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방과 욕실의 면적을 보통 요양시설의 면적보다 1.2~1.5배 넓게 구획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간이 넓어지면 마음의 여유가 생길 뿐 아니라 움직임도 수월해져 입소하기 전의 신체 기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이 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공간이 넓어서 자기 물건을 보관할 수 있으면 아무래도 낯선 환경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활동 반경이 넓어져 낙상사고 등 안전사고가 줄어드는 것도 이점"이라고 말했다.
'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집'
마감재는 벽돌, 목재와 같은 자연적 소재를 사용해 따뜻함을 살렸다. 어르신들의 손이 닿는 문 손잡이나 난간 등은 철재나 플라스틱 소재의 기성품이 아닌 나무로 직접 제작하고, 방의 가구는 안정감을 주는 어두운 갈색을 선택했다. 새집처럼 쾌적하고 깔끔하지만 오래된 정취를 담아 낯선 느낌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야외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들을 다양하게 구획한 것도 노인들의 신체, 인지 능력을 배려한 설계다. 권 소장은 "휠체어를 탄 채로 채소를 관리할 수 있는 텃밭 상자를 디자인해 배치했고, 볕이 좋은 날에는 보행 감각을 깨울 수 있는 산책로,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다앙햔 모양의 벤치를 뒀다"고 전했다.
로비에 방문객을 위한 공간이 아닌 직원 식당이 자리를 잡은 것도 남다른 점이다. 머리가 희끗한 요양보호사 40여 명이 식사를 하는 공간이다. 이 원장은 "식사 시간은 요양보호사들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인데, 그 장소를 어두컴컴한 지하에 두고 싶지 않았다"며 "요양보호사 선생님들도 60세 이상 노인 세대가 대부분인데 이분들이 편안하고 행복해야 돌봄의 질도 높아질 수 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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