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트! 이름조차 아름다운 중앙아시아 고도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한 제라프샨강 위에 자리한 이 도시는 문자 그대로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다.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던 이 도시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올라간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시 끝까지 저항했던 소그드인들의 도시 마라칸다가 바로 지금의 사마르칸트이다.
소그드인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중국을 연결하는 유라시아의 동서 교역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6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실크로드 무역 전성기에 동, 서, 남으로 연결되는 실크로드 무역을 장악하고 당나라까지 진출하였다. 사마르칸트의 유적지 아프라시압은 소그드인들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주는데, 그중에서도 궁전 벽화는 소그드인들의 국제적 교류의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 외국 사신도에는 고구려인으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보인다.
사마르칸트의 최전성기는 14~15세기 티무르 제국 시기에 왔다. 티무르 제국의 설립자 아미르 티무르는 여러 차례 원정을 통해 주변 지역을 정복하였으니, 티무르 제국의 영토는 한때 이란의 대부분 지역, 델리를 포함한 인도 북부, 캅카스까지 다다랐다. 이 티무르 제국의 수도가 사마르칸트였으니, 당시 사마르칸트는 정치권력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건축, 학술, 문화, 과학의 중심지였다. 이슬람 건축의 가장 뛰어난 예로 간주되는 레기스탄 광장의 마드라사(교육기관), 비비 하늠 모스크, 샤히 진다 성묘, 구리 미르, 그리고 울룩 벡 천문대 유적지 등이 다 이 시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티무르 제국은 오래가지 않았다. 16세기에 들어서서 우즈베크인들이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히바 칸국, 부하라 칸국, 코간드 칸국을 차례로 수립하자 사마르칸트는 부하라 칸국의 영유가 되었다. 이후 19세기에 러시아 세력이 지속적으로 남하하면서 중앙아시아는 점차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1868년 러시아군이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자 부하라 칸국은 결국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것은 실질적으로 부하라 칸국의 러시아 속국화를 의미했다. 이때부터 사마르칸트의 역사는 러시아 제국 및 소련과 운명을 같이했다. 1991년 소련의 해체 시점까지 말이다.
나에게는 이번 사마르칸트 방문이 두 번째다. 첫 방문은 30년 전, 구소련 시절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30년 전의 사마르칸트를 현재의 사마르칸트와 비교해 보는 것은 쏠쏠한 재미를 준다. 사마르칸트, 아니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유적지 레기스탄 광장을 예로 들어보자. 1991년 레기스탄 광장은 몹시 황량하고 쓸쓸했다. 마드라사들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상태로 흙먼지 날리는 광장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주변에 다른 방문자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과거의 한 시점으로 빨려 들어간 듯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제 저녁 방문한 레기스탄 광장은 내 기억 속의 그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통해 3개의 마드라사들은 과거의 위용을 되찾았고 멋진 조명으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광장은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뿐 아니라 40도를 넘나드는 무더위를 피해 밤 시간에 삼삼오오 가족, 친구들과 놀러 나온 사마르칸트 시민들로 북적였다. 죽어 있던 레기스탄 광장이 오랜 잠을 깨고 다시 살아난 듯했다.
어찌 레기스탄 광장뿐이겠는가?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 자체가 구소련의 흔적을 지우고 옛 소그드인들처럼 세계와 연결되고 교류하고 더불어 발전하는 나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타지크계 사마르칸트인이며 러시아어로 교육하는 학교를 나와 한국 광주의 전남대학교를 다닌다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청년의 모습에서 우즈베키스탄의 밝은 미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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