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된 고통, 증발된 기억

입력
2022.07.26 04:30
수정
2022.07.30 05: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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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2015년 4월 고(故) 홍순의 할아버지가 코리아타임스와 강제징용 피해 사실에 대해 인터뷰하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5년 4월 고(故) 홍순의 할아버지가 코리아타임스와 강제징용 피해 사실에 대해 인터뷰하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남편이 소송을 도맡아왔는데 남편마저 세상을 뜨고 나니 아무것도 모르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어요. 들은 얘기도 없고, 남아있는 것도 없어 혼란스럽기만 해요."

2019년 6월 27일 강제징용 피해자 14명과 그 가족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항소심 판결 후 박영숙씨는 나지막이 토로했다.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승소했지만, 기쁨보단 혼란이 컸다. 박씨는 사건 당사자도, 당사자의 직계 자손도 아니다. 사건 당사자인 홍순의 할아버지의 며느리다.

이 사건 재판에는 생존 피해자가 한 명도 없다. 홍순의 할아버지가 마지막 생존자였는데,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다 2015년에 눈을 감았다. 당시 원고단 단장이었던 박상복씨 또한 "문제 해결이 늦어지면서 1세대 어르신들이 다 돌아가시고 2∙3세대까지 고통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최근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을 위한 한일 양국 간 움직임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모두가 '배상'에 주목하고 있지만,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 있다. 사라져가는 기록 수집의 필요성이다.

1939년 시작된 일제의 강제동원령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가까스로 목숨만 보전해 귀환한 조선인은 대략 110만여 명에 달한다. 해방되고도 돌아오지 못한 이들까지 포함하면 3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현재 이들 중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고, 생존자들은 대개 90~100세로 매우 연로하다.

살아 돌아온 이들의 기억에는 더 이상 살이 찌지 않는다. 도리어 모진 세월의 풍파에 닳아져 갈수록 야윌 뿐이다. 수도 없이 많이 피해를 증언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기록되지 못했다. 활자화되지 못한 기억은 뭉개지고 희미해지다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건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다. 이들이 입은 피해를 입증할 자료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정부의 무심함 속에 빛을 바랜 채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실제 2004년 꾸려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세 차례에 걸쳐 총 22만여 건의 강제징용 피해를 접수했지만, 이 중 증거자료가 있는 경우는 약 20%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피해 당사자나 가족의 기억으로만 피해 사실을 주장할 뿐 이를 뒷받침할 사진이나 문서는 갖추지 못했다. 피해자 대부분이 해방과 동시에 가까스로 작업장을 탈출하느라 증거자료를 거의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져온 몇 안 되는 사진이나 일기 등의 증빙자료는 정부가 1974년 청구권보상법률에 따라 보상금 지급을 위해 수집했다가 잃어버렸다. 현재 남아있는 건 신고인 명부와 보상금 지급대장뿐이다.

일본정부와 기업이 수십 년간 공개하지 않고 있는 수많은 공탁금 명부와 후생연금명부 등을 확인하면 피해자들이 보다 수월하게 자신의 피해를 입증할 수 있지만, 이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언젠가부터 희미해졌다.

기록은 진실을 밝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자 동시에 가해국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일본의 역사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록은 반드시 필요하다. 피해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너무 연로한 지금, 이들의 피해를 입증할 기록들을 모으는 건 정부의 몫이다. 정부는 피해 배상 절차와 함께 근거 자료 수집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김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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