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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하다"는 단골들과 함께 한 50년...세월의 흔적이 '모락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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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에 빨간 글씨가 새겨진 일요일이면 아빠나 엄마 손을 잡고 목욕탕에 꼭 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뜨거운 열탕에서 때를 불리고, 살갗이 빨갛게 될 때까지 때를 미는 '고행'이 끝나면 수영장 삼아 놀 수 있는 냉탕으로 직행했다. 그 시절 목욕탕은 어른들의 사랑방이자 아이들의 워터파크였다. 크고 작은 목욕탕이 동네 곳곳에 있었지만, 추석과 설 등 명절을 앞둔 시기에는 인산인해로 탕에 발을 디딜 틈조차 없었다.
세월의 흐름에 동네 목욕탕도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개별 가구마다 번듯한 욕실을 갖춘 아파트가 늘면서 동네 목욕탕을 찾는 발길도 줄었다. 2000년을 전후로 등장한 '찜질방'이라는 강력한 경쟁자는 식당과 수면실, 오락실까지 갖추고 동네 목욕탕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2020년 1월 상륙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동네 목욕탕의 설 자리를 더 좁게 만들었다.
사라져 가는 목욕탕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 10년간 목욕탕 3곳 중 1곳이 간판을 내렸다. 19일 행정안전부의 '지방행정 인·허가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으로 영업 중인 전국의 목욕탕은 6,173개다. 2012년부터 올해 6월까지 폐업한 목욕탕만 전국적으로 3,609개다. 신고 없이 영업을 중단한 목욕탕까지 더하면 폐업한 목욕탕 숫자는 더 늘어난다. 그런 틈에서 아직 명맥을 유지하는 곳이 인천 동구에 있다. 송현동 세계목욕탕이다.
서울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에서 송현동 순대골목거리를 지나 인천 북항 방향으로 걷다 보면 흰색 페이트로 '세계탕'이라고 쓰인 붉은색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나 석탄으로 물을 데우던 시절, 굴뚝은 멀리서도 목욕탕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입간판 역할을 했다. 벽돌을 네모 모양으로 쌓아 올린 세계목욕탕 굴뚝에 묻어 있는 검은 그을음은 50년이 넘은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세계목욕탕은 1970년쯤 문을 열어 2대째 운영 중이다. 2대 사장 김수남(67)씨와 부인 홍경숙(66)씨는 "남편이 중학교 2학년 때 개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시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목욕탕을 2002년 10월 우리 부부가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세계목욕탕이 처음 문을 열 당시만 해도 주변에 경쟁 목욕탕이 꽤 많았다는 게 김씨 부부의 얘기다. 인근 화수부두가 수도권 제일의 새우젓 전문시장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세계목욕탕에는 성수기에 하루 손님이 200~300명에 이를 정도로 붐볐다. 세계목욕탕의 경쟁력은 '물'이었다. 홍씨는 "다른 목욕탕이 지하수를 받아 쓸 때 우리는 수돗물을 데워 썼다"며 "지하수는 겉 때만 잘 벗겨지고 속 때는 잘 안 벗겨지는데, 수돗물은 달랐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세계목욕탕 입구에는 '100% 수돗물'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붙어 있다.
세계목욕탕의 장수비결은 단골손님들이다. 송현동 주변에도 찜질방과 스파 등이 속속 들어섰지만 20대부터 목욕탕을 다닌 손님들이 70대가 돼서도 찾는다는 게 홍씨 설명. 홍씨 부부는 지금도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보일러를 틀고 물을 받는다. 홍씨는 "새벽 4시 40분에서 50분 사이에 손님을 받기 시작해 저녁 4, 5시까지 12시간 영업한다"면서 "뜨내기 손님은 거의 없고, 정기적으로 오는 손님이 40~50명 정도인데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귀띔했다.
한때 세계목욕탕은 여름철 비수기인 7, 8월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주말만이라도 열어 달라'는 단골들 성화에 수년 전부터 여름에도 주말에는 정상 영업을 한다. 올해도 지난달 18일부터 주중에는 문을 닫고 주말에만 영업 중이다.
홍씨 부부는 손님들 도움으로 코로나19 대유행과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정부 지침에 따라 거리두기를 하고 사우나를 닫았지만 단골들 발길은 끊기지 않았다. 목욕탕 안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지침이 떨어지자 손님들은 집에서 쓰지 않는 마스크를 목욕탕에 가져다 주기도 했다. 홍씨는 "목욕탕 거울 밑에 마스크를 비치해서 마스크를 잊고 온 할머니들이 쓸 수 있게 했다"며 "음식은 물론이고 우산도 잊고 온 손님들에게 주라고 가져다주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홍씨 부부는 목욕탕을 물려받고 3년 뒤인 2005년 남탕을 없앴다. 지금도 여탕만 운영 중이다. 현재 사우나와 냉탕이 있는 목욕탕 안쪽이 과거 남탕이었다. 천연옥탕과 온탕, 세신대가 있는 바깥쪽은 여탕이었다. 홍씨는 "큰 목욕탕들이 생기면서 우리도 대형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남탕과 여탕 사이에 있던 벽을 허물고 남탕을 없앴다"며 "여탕 크기를 키우고 황토방, 테마탕도 설치했지만 (대형 목욕탕과) 경쟁이 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송현초등학교 앞길 모퉁이에 자리한 세계목욕탕은 2층 건물이다. 2층은 홍씨 부부가 거주하는 가정집이고 1층이 목욕탕이다. 1층에는 출입문이 2개가 있지만 남탕을 없앤 이후 하나만 사용 중이다. 출입문을 지나면 '남성 출입금지'라는 글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카운터에는 사람 대신 '안으로 들어오세요'라는 안내판이 있다. 다른 목욕탕은 주인이 카운터를 지키지만 세계목욕탕은 탈의실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여탕만 있고 뜨내기 손님이 거의 없어서다. 홍씨는 "손님들이 고령이다보니 낙상사고가 가끔 발생하지만 도난사고는 한 번도 없었다"며 "탈의실에서 손님들과 수다도 떨면서 함께 있다 보니 도난사고가 생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쉬는 날을 이용해 들어가 본 세계목욕탕 내부는 옛 동네 목욕탕 모습 그대로였다. 탈의실 나무 옷장에는 고무줄에 번호표가 달린 열쇠가 꽂혀 있었고, 옷장 위에는 목욕용품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촘촘하게 놓여 있었다. 좌식 샤워기 옆에는 요즘 목욕탕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바가지탕도 있었다. 때를 밀고 나면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이 아닌 바가지탕에서 퍼낸 물로 몸을 씻는 게 그 시절 '국룰(국민 룰)'이었다.
세계목욕탕 목욕료는 대인 6,000원, 소인 3,000원이다. 몇 년 전 5,500원에서 500원 올린 뒤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가스비와 수도세 등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홍씨는 "작은 목욕탕이어서 손님들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다 보니 큰 목욕탕처럼 요금을 막 올릴 수가 없다"면서 "그래도 유지를 위해 500원이라도 가격을 올렸다"고 말했다.
세계목욕탕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분위기다. 홍씨는 "매주 목욕탕을 찾던 단골손님이 안 보이면 안부를 수소문한다"면서 "그중 절반은 아프시고 일부는 돌아가신 분도 있다"고 말했다. 주변에 주민 전용 사우나를 갖춘 대단지 아파트까지 들어서고 있지만 홍씨 부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목욕탕을 계속 운영할 생각이다. "한 주라도 목욕을 거르면 개운하지 않다"는 단골손님들을 생각해서다. 홍씨는 "자식들 공부에 결혼까지 다 시켰고, 내 집이라 인건비가 안 들어 버틸 수 있다"며 "단돈 6,000원으로 3, 4시간 사우나와 냉탕을 오가며 피로를 풀고, 몸까지 깨끗해지는 목욕탕을 운영하는 것도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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