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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월급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입력
2022.07.20 04:30
수정
2022.07.20 07:53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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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일보 자료사진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일보 자료사진

'4,419.'

자카르타 특파원 3년 임기를 마치고 2월에 돌아왔다. 누군가 '기억에 남는 일'을 물으면 저 숫자를 앞세운다. 2019년 '한인 봉제업체 사장의 야반도주' 사건이 한국일보에 보도된 덕에 체불임금을 돌려받은 인도네시아 노동자 숫자다. 주변 취재만 하던 한 달 뒤 지인이 빌려준 차를 타고 드디어 자카르타 외곽의 그 공장에 갔다.

겪어봐서 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몇 달째 받지 못한 묘한 기분을. 분노 비굴 자학 비애 오기 포기 같은 감정이 뒤섞이다 망연자실에 이른다. 그날 공장 옆 허름한 야외 식당에 주저앉은 노동자들의 낯빛이 그랬다. 업주는 이미 5,000㎞나 떨어진 한국으로 달아난 뒤였고, 노동자들은 그저 세상과 단절된 공장을 하염없이 지키고 있었다.

관련 기사를 한 달 넘게 썼다. "한국 기자가 인도네시아 노동자 얘기만 써서 한국 기업 전체가 욕먹는다"는 역공에 시달렸다. 항의 전화 받다가 울기도 했다. 월급이 입금된 날 다시 찾은 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웃었다. 사업하는 한인들은 대략 말한다. "(그 기자가) 밉다. 그래도 그 뒤로 야반도주 사건이 없다." 미움 좀 받으면 어떠랴, 고맙고 다행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경제에서 임금은 노동자의 존엄이다.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가족과 함께(어떤 이는 홀로) 먹고 입고 미래를 꿈꾸는 보루다. 타인과 더불어 사는 자존심이다. 나보다 못한 이들에게 틔우는 배려의 싹이다. 내 월급 귀하면 남의 월급 귀한 줄 알아야 한다. 상식이 있는 사용자라면, 정부라면, 정치인이라면 "내 월급부터 깎는다"고 선언하는 게 순리다.

추경호 부총리의 "과도한 임금 인상 자제" 발언과 인식은 그래서 아쉽다. 맥락은 부드러울지언정 귀결은 거칠다. '물가는 안 잡고 월급쟁이만 잡는다'는 불만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 압력 요인이라는 사실쯤 누구나 안다. 임금 격차가 사회적 갈등 요인이라는 문제의식, 대부분 갖고 있다.

오히려 묻는다. 베테랑 경제 관료조차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복합 위기'라면서 왜 해법은 구태의연한가? 월급쟁이의 마지막 동아줄인 임금을 건드리는 정부 정책은 공정한가?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인하 같은 '재벌ㆍ부자 감세'는 물가 상승이나 갈등 요인이 아닌가? 인플레 방어, 고통 분담, 세제 정상화라는 수사로 답하고 눙치기엔 월급쟁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예컨대 본보가 국세통계연보를 분석했더니 중ㆍ저소득층 급여가 29% 오를 때 근로소득세는 42% 뛰었다. 올해 실질임금 감소폭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크고, 1분기 중산층 노동자 가구의 월평균 실질소득은 감소했다는 통계도 있다. '소리 없는 증세'를 떠안은 것도 모자라 고물가 부담이 서민에게 집중된다는 뜻이다.

위기 때마다 이 땅의 월급쟁이들은 허리띠를 졸라맸다. 임금이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해도 착실히 세금 내고 빚을 갚고 가족을 부양하고 씀씀이를 줄였다. 없는 살림 쪼개 소액 기부하는 직장인도 많다. 이번에도 그리할 것이다.

정부는 임금은 시장 자율에 맡기고 노동자의 가처분소득을 보전할 안전장치부터 마련하기 바란다. "중장기 과제"라며 제쳐둔 소득세도 합리적으로 개편하기 바란다. 그것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 외친 '능력주의' 정부가 할 일이다.

고찬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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