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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인데 다 쓰게?" "명절에 붙여가게?" 휴가 좀 편하게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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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올해 1월 초 A중소기업 기획부서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박 주임. '사수'라 부르는 바로 윗선배 김 대리에게 최근 이런 말을 들었다. "휴가 다 쓰게?"
이제 겨우 입사 반년 차. 여전히 살얼음판인 직장 생활에 또 한번 위기가 찾아왔다.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네? 아, 아니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여름휴가 가겠다고 먼저 말한 것도 아닌데, 무방비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들으니 이런 바보 같은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김 대리의 아무 말 대잔치. "난 신입 때 다 못 썼거든. 자기(박 주임)는 어떻게 할 건가 궁금해서. 팀장님은 연말은 돼야 한 2, 3일 가신다는데. 아~ 나도 휴가 가고 싶다."
휴가를 가란 말인가, 가지 말란 말인가. 가도 되는데 3일 이상은 가진 말란 말인가? 다 같이 연말 이후(그럼 내년인데?)에나 갈 수 있단 말인가. 뭐 어쩌란 말인가. 박 주임은 결국 김 대리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날 하루를 마감했다.
박 주임이 7월 현재 보유한 법적 연차는 5일(근로기준법 제60조 2항에 따라 1개월마다 1일의 유급휴가 발생·1개월 개근 전제)이다. 하지만 8월 초등학생 조카의 여름방학에 맞춰 가기로 한 가족여행은 갈 수 없을 것 같다.
박 주임의 입사 동기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신입사원에게 휴가는 입에 올려선 안 되는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박 주임의 동기 이 주임은 얼마 전 조모상(祖母喪)을 치렀다. 출근 전 이른 새벽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오전 일찍부터 해야 하는 부서 행사 준비를 위해 슬픔을 누르고 출근했다.
점심시간 직후 팀장에게 조심스럽게 소식을 전했다. "아 그래? 가봐야겠네?" 옆 자리 차장이 거들었다. "아마 회사 규정에 조부모상 경조휴가가 이틀인가 3일인가 있긴 할 텐데." 고마움도 잠시였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이 이어졌다. "조부모상에 그걸 다 챙겨 쓰는 사람이 없어서 정확히 모르겠네." 3일 후 새벽같이 출근한 이 주임은 동기들과의 단체 채팅방에 "장례식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고 털어놨다.
휴가 앞에 작아지는 건 신입사원만이 아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휴가로 눈치 보는 사람이 있냐고 반문하는 자, 모두 유죄다. 동료의 긴 휴식에 유독 야박하고, 비교적 잦은 휴가(연차) 신청을 '개념 없고 조직 생활 기본이 안 된 직원'이라고 낙인 찍는 경우도 많다. 독일의 명상가이자 경영컨설턴트 니콜레 슈테른은 저서 '혼자 쉬고 싶다'에서 "우리는 일하기 위해 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쉬기 위해 일한다"는 명언을 남겼지만 현실에선 온전한 휴식을 사수하기가 쉽지 않다.
한 의류 브랜드에서 일하는 최모(37) 과장의 말이다. "코로나 전 추석 연휴 전후로 이틀씩 연차를 붙여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동료한테 업무를 떠넘기고 간 것도 아니고, 팀이 한창 바쁠 시기는 더더욱 아니었어요. 당시 상사가 '누구는 그렇게 갈 줄 몰라서 안 가는 줄 아느냐'고 웃으며 한마디하더라고요. 정작 연차는 딱 4일 쓴 건데 말이죠."
마음대로 아프지도 못 한다. 국내 한 건설사에서 일하는 이모(28)씨는 "생리휴가가 있지만 한 번도 신청을 못 해봤다"고 했다. '몸이 안 좋다'는 이유에 유독 쌍심지를 켜는 상사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보는 눈이 있으니 '무슨 생리휴가까지 챙겨 가느냐'고 대놓고 큰소리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씨는 "쓰러지고 어디 부러지지 않는 이상 일반 보건휴가도 눈치 안 보고 쓰는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연차 사용은 법으로 보호받는 근로자의 권리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은 본능적으로 안다. 올해도 내 연차를 다 쓰진 못할 것이란 걸. 채용 플랫폼 사람인이 지난해 말 직장인 1,457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봤더니, 응답자 절반가량(49%)이 "올해 연차를 다 못 쓸 것 같다"고 답했다. 연차를 못 쓰는 이유로 △인력부족으로 인한 업무 과다 △연차 사용이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를 가장 많이 꼽았다.
상사들도 할 말은 있다. 대기업에서 임원을 지냈던 조모씨는 "부서마다 또는 팀마다 가장 바쁜 시기가 있다"며 "이때 꼭 휴가를 가야 한다면, 동료나 상사한테 적어도 이해를 구할 필요는 있지 않냐"고 반문했다. 조씨 말에 따르면 담당 업무를 제대로 마무리짓지도 않고 무작정 휴가를 떠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단다.
20년 차 부장급 이모씨는 "휴가 때 전화한 최악의 상사가 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두어 달 전 구두로 휴가 신청을 한 뒤 아무 말이 없다가, 당일 아침 결재만 달랑 올리고 휴가를 떠난 직원이 있었단다. 업무 진행이나 인수인계 상황이 전혀 공유가 안 돼 정말 불가피하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휴가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1도 없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단다. 이씨는 또 "적어도 하루 전에는 '내일부터 휴가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 한마디 할 수 있지 않냐"며 "조직 생활의 기본이란 생각이 드는데 꼰대 같은 발상이라면 할 말이 없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눈치는 볼지언정 연차라도 있는 직장인은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상시 근로자 수 5명 미만인 사업장은 현행 근로기준법상 연차 휴가 의무 대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아예 연차 휴가를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한다. 이들의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지만, 영세 사업장의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노동 전문가들은 근로자가 원할 때, 원하는 기간만큼 자신에게 보장된 휴식을 얻는 건 기본적인 권리라고 입을 모은다. 물론 근로자가 청구한 연차 사용일로 인해 업무나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생길 경우, 사업주는 연차 사용 시기를 변경할 수 있다. 하지만 회사 측이 특정 기간에 연차 소진을 강요하거나, 정당한 이유나 근로자와의 합의 없이 연차 사용 시기를 정하는 건 근로기준법 위반(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 소지가 있다.
권남표 노무사는 "영세한 사업장일수록 회사 측이 특정 기간에 연차를 소진하도록 강요할 경우 근로자가 이를 거부하기 힘든 게 현실"이라며 "내가 연차를 쓰고 싶을 때 쓰는 건 정당한 권리라는 걸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근로자 대표 권한을 갖는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이라면 노조를 통해 부당함에 대응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연차를 신청할 때마다 '사유'를 밝혀야 하는 상황이 근로자의 휴식권을 방해하는 요인이란 지적도 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 여수진 노무사는 "문서상으로나 구두로나 연차 사유를 묻는 문화가 있는 한, 근로자들은 상사 눈치를 한 번 더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여 노무사는 "근로자의 연차 사용은 상사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연차 사용 권한은 전적으로 근로자에게 있다는 걸 회사 측이 명확하게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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