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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게바라? 인구 6억2,500만.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33개 이상의 나라에서 각자 모습으로 공존하는 중남미의 진짜 모습을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가 전해준다.
1799년 독일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는 스페인 왕국으로부터 신대륙 영역에 대한 '천문을 관측하고, 산의 높이를 측정하며, 땅에서 자라는 모든 것을 수집하고,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어떠한 작업도 수행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는 1804년까지 현재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멕시코, 쿠바 등을 돌며 화산과 폭포, 바다와 정글에서 중남미 대륙의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경험했다. 안데스산맥의 봉우리는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인 몽블랑보다도 높았다. 지진, 홍수, 해일 등 자연은 인간 사회 발전을 위한 단순한 배경이 아닌, 운명을 결정짓는 필연이었다.
1831년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비글호에 몸을 싣고 약 5년간 갈라파고스를 포함한 중남미 대륙과 섬을 자유롭게 탐험하고 해안을 조사했다. 그는 동·식물 및 지질을 관찰하며 진화론의 기초를 다졌다. 1835년 칠레 콘셉시온 근처에서 규모 8.5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그는 지진이 바꿔버린 자연을 연구하며 지진, 화산, 지각의 수직운동에 대한 이론을 정리했다.
중남미 대륙에서 지진을 비롯한 대규모 자연재해는 오랜, 그리고 흔한 일이었다. 자연재해는 때로는 뜻하지 않게 정치 지도를 바꾸기도 했다. 남미 독립을 이끈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가 1811년 독립전쟁 시작 후 건설한 제1공화국은 1812년 카라카스에서 발생한 지진과 원주민 인디오들의 반란으로 무너졌다. 남미 연방의 꿈은 이후에도 이어진 자연재해와 크리올들의 이권 다툼 속에 산산조각이 났고, 중남미는 30개국이 넘는 독립 국가로 쪼개졌다. 미 의회가 니카라과운하를 승인하기 직전인 1902년, 모모톰보 화산이 폭발하며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교통로의 행운은 파나마가 차지하게 되었다.
1985년 멕시코시티에서는 규모 8.0의 지진이 발생했다. 영화 '7:19'(2016)는 지진으로 갇힌 각계각층 사람들이 생존의 갈림길에서조차 피부색과 계급을 운운하는 중남미의 서글픈 현실을 보여준다. 영화 '33'(2015)은 2010년 칠레 북부 코피아포에서 광산 붕괴로 매몰되었던 광부 33인의 생존기다. 그러나 생존 이후 33인의 현실은 씁쓸하다. 당초에 약속되었던 정부 지원금은 두 달 만에 끊겼고, 약속된 취업자리 알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 상당수의 가정은 깨졌고, 방송 출연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는 칠레 북부 광산촌에서 이들의 생존기는 취임 초기 피녜라 대통령에게 허니문 효과만 안겨주었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불의 고리'. 약 3,000여 개의 화산이 움직이는 중남미. 이제는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 홍수에 더해 코로나19 여파와 경제 위기까지 덮쳐 온통 심란한 소식뿐이다. 페루, 에콰도르에 이어 파나마까지 물가 상승으로 인한 시위 도미노, 60%라는 역대 최고 인플레를 기록 중인 아르헨티나, 이제는 중남미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중 하나가 된 중남미의 모범생 칠레, 아이티의 갱단 전쟁.
누군가는 묻는다. 왜 중남미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느냐고. 케 세라 세라(Qué será será)는 '될 대로 되라'가 아니다. 영어로는 'Whatever will be',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엇이 되든, 받아들이며 산다는 의미다. 어쩌면 그들은 웅장한 자연에 순응하고 거스르지 못할 자연재해에 적응하며 인재조차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운명이 숨겨둔 행운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찾아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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