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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의 이야기에서 벗어나기...자녀 생살여탈권, 부모에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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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사람의 가치관은 그가 보고 들은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인간이 배우며 성장하는 방법에는 직접 체험과 간접 체험이 있는데, 간접 체험은 크게 보면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든,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기사와 영상을 읽고 보고 듣든, 주위 사람들의 경험담을 듣든 말이다. 우리는 평생 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이 세상을 간접 경험하고 자신과 타인, 사회, 세상을 이해하는 존재다.
그러기에 어떤 이야기를 접할 때 '누가, 어떤 입장에서 무슨 목적을 위해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어린 시절, 명작 동화와 위인전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입장에서 내용을 파악하던 버릇을 성인이 된 후에까지 갖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세상의 매체를 장악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지배하는 강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은은하게 세뇌되기 마련이다. 강자들이 보여주는 대로 세상을 보게 되고, 그들의 입장에 감정이입하여 약자들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내가 약자 집단에 속하는데도 강자 집단의 이익을 챙겨주게 된다. 내게 익숙한 이야기를 다른 시선으로 보는, 일종의 '과거(이야기)사 청산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그림 형제의 고전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보자. 헨젤과 그레텔은 가난한 나무꾼인 아버지, 계모와 산다. 가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계모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이러다가는 모두 굶어 죽게 될 테니 아이들을 숲속에 버리고 오자고. 다음 날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숲속 깊이 들어가서 버리고 온다. 아이들은 하얀 조약돌을 떨어뜨려 길을 표시했기에 집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흘러 기근이 들었다. 계모는 또 남매를 버리자고 한다. 이번에는 남매가 길을 잃는다. 길을 표시하려고 뿌려 놓은 빵 부스러기를 새들이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숲속을 헤매던 아이들은 빵과자 집의 마녀를 만난다. 남매는 마녀를 물리친 후 마녀의 보석을 갖고 집으로 돌아온다. 계모는 죽고 없었다. 아이들과 아버지는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헨젤과 그레텔'은 독일어권에 구비전승되던 마녀와 버려지는 아이들 이야기를 그림 형제가 채록하여 만든 동화다. 민담을 바탕으로 한 동화들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폭력적이거나 성적인 면, 비윤리적인 부분이 수정되어 더욱 동화적이고 교육적인 방향으로 바뀐다. '헨젤과 그레텔' 역시 그렇다. 1812년의 초판본에서는 아이들을 갖다 버리자고 제안하는 엄마는 친모였다. 곧 다음 판본에서 이야기가 바뀐다. 못된 계모가 착한 친아버지를 부추겨서 아이들을 버리게 하는 것으로.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친자식을 버릴 수가 있느냐?'는 도덕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전근대 시대에는 식량이 부족할 경우 영아를 죽이거나 유아를 버리는 일이 흔했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아버지는 공범이다. 그런데 왜 계모만 비난받을까? 아버지는 계모와 함께 숲에 가서 헨젤과 그레텔을 버렸다. 아이들을 버리자고 먼저 말한 사람은 계모지만, 친자식을 버린 친부 입장이니 아버지가 더 비난받아야 하지 않을까? 친모가 아이들을 버리자고 제안하는 초판본의 이야기에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항의했기에 그림 형제가 다음 판본에서 친모를 계모로 바꾸지 않았나. 그렇다면 왜 아버지는 계부로 바꾸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자식을 기를 것인지 죽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가부장에게 주어진 권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젤과 그레텔의 친아버지는 자식을 버린다는 도덕적 비난을 받지 않는다. 당연한 자기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니까.
고대로부터 가부장에게는 '가족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 즉 가족 구성원을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처자식은 가부장이 소유한 물건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당연시하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약 성경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여서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치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 여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시키려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역사에는 660년 5만여 나당연합군에 맞서 결사항전하려는 계백이 황산벌 전투 출전에 앞서 처자식을 죽이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 이삭과 이피게네이아와 계백의 처자식들의 마음이 어땠는지, 자신을 죽이려는 가장에게 진심으로 동의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이 가부장들의 신과 조국과 대의를 위한 비장한 마음은 여전히 미화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렇듯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가부장들의 가족 생살여탈권에 동의하며, 오히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가부장들에 감정이입하여 그들을 이해하고 심지어 추앙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헨젤과 그레텔을 버리는 대목에서 계모만 욕하고 지나가는 것은 가부장의 이익을 옹호하는 기존의 이야기들에 익숙하다는 증거가 된다.
한편, 이야기들은 가부장이 잘못을 했을 경우에는 본인보다 그릇된 쪽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긴 여성을 더 나쁜 존재로 그린다. '헨젤과 그레텔'과 '장화홍련전'에서 공범이거나 방조한 친부보다 계모가 비난을 받는 상황을 보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비난은 늘 여성이 받는다. 강자인 남성의 입장에서 상황을 파악하도록 길들여졌기에,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지나가지만, 약자인 여성이 다른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도덕적 잣대로 더 엄격히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야기 속의 계모가 아동 학대 주범으로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것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동화 속 계모들은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는 '헨젤과 그레텔'에서처럼 식량이 부족해서였지만 '신데렐라'나 '장화홍련전'처럼 살 만한 집에서도 전처 자식을 구박한다. 이유가 뭘까?
위생과 영양 상태가 불량했던 과거에는 출산하다가 사망한 산모들이 많았다. 아내를 잃은 남성은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해줄 여성이 필요했다. 부유한 경우에는 유모와 일해줄 여성을 고용하기도 했지만 대개 재혼을 했다. 이때 후처로 들어온 여성이 낳은 자식은 전처 소생의 아이들에게 상속권이 밀리게 된다. 장자 상속법에 의하면 토지나 저택은 맏아들만 상속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처가 친정에서 지참금으로 가져온 재산이라면 상속은 무조건 전처 자식이 받게 되어 있다. 신데렐라가 다른 곳에 가서 그 정도 일을 해주면 먹고살 수 있는데도 계모의 구박을 받으며 집에서 버티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에 의하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도 바로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계모의 후견 아래에 있다가 성인이 된 다음에 상속받기 때문이다.
늙어서 자식의 봉양을 받으려면 자식이 부유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 친자식에게 유산을 몰아주어야 한다. 결국 살 만한 집에서도 계모는 친자식의 미래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후가 불안했기에 상속권을 포기하고 가출하게 만들려고 전처 소생 아이를 구박했던 것이다. 아, 역사적으로 이야기에 이런 배경이 반영되었다는 것뿐이다. 이런 이야기 때문에 재혼한 여성과 그들의 가정에 대해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지난 29일, 전남 완도에서 실종된 일가족의 승용차가 인양되었다. 승용차 안에서는 조모씨 가족 3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일단 '가족 동반 자살'이란 표현을 쓰지 말 것을 제안한다. '동반 자살'은 고대 가부장의 가족 생살여탈권을 반영한 말로,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고, 친부모인 자신만이 자녀의 행복과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폭력적인 생각이 바탕에 있다. 그러나 부모가 없어도 아이들의 삶은 계속된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다른 가족의 보호를 받을 수도 있다. 구박하는 계모가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는 잊자. 이성애자 친부모와 친자식으로 구성된 가족만이 이상적인 행복한 가정이라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버리자. 또 부모 본인이야 어떤 선택을 하든, 남은 아이들이 사회 구성원으로 잘 자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 익숙해진 이야기를 버리자. 가부장의 입장에 감정이입하여 '오죽했으면...'이라며 고대의 생살여탈권을 행사한 사람들을 이해해주지 말자. 과거든 현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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