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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선 이상하게 눈물이 자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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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만약 가수 싸이가 콘서트 도중에 마이크를 관객 쪽으로 돌리며 “목포는”이라고 외친다면, 객석에서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십중팔구 “항구다”라고 소리 질러 답하지 않을까? ‘목포는 항구다’라는 말은 그만큼 유명하다. 그런데, 목포는 항구지만 정작 목포에 가서 항구를 본 적이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만약 목포에 다녀온 적이 있다면 목포 여행의 일반적인 동선을 한번 상상해보자. 전 일본영사관을 중심으로 하는 만호동 일대 과거 일본인 거주 지역에 아직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의 흔적들을 둘러보는데 하루, 옥단이길을 품은 목원동 일대의 옛 조선인 거주지역에선 오거리를 중심으로 한 문화의 자취들을 둘러보는 데 하루가 걸린다. 그래서 목포 여행 기간은 2박 3일로 잡는 경우가 많다.
관광객이 즐겨 찾는 식당도 대개 이 원도심 안에 있다. 점심으로 민어의 거리 초입에 있는 초원음식점에서 갈치찜에 소주 한 병을 홀짝 비운 뒤에 꽃게살비빔밥을 시켜 빨갛고 단 게살 양념에 흰 쌀밥을 쓱싹 비벼 먹으면, 그것이 바로 행복. 저녁 식사로는 덕인집에서 육질 좋은 흑산도산 홍어를 먹거나 영란횟집에서 민어 부레가 함께 나오는 민어회, 민어전, 민어탕 코스를 즐긴다. 낮 시간이 좀 남으면 100년 된 적산 가옥을 개조한 카페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켜 놓고 더위를 식히거나 근대문화 전시관들을 찾아 다닌다. 이른 아침에 해장을 하고 싶으면 유달콩물에 가서 콩국수를 시켜서 콩물로 속을 달랜다. 이 모든 동선이 만호동과 목원동 및 유달산 일대에 밀집되어 있다. 내 경우 지난 10년 사이 한여름의 좋은 날만 골라 최소 2박 3일짜리 목포 여행을 네 번은 다녀왔고 그 코스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목포는 항구가 아닌가? 목포는 항구잖아? 그런데 왜 난 항구를 본 적이 없을까? 지도로 보면 영란횟집에서 목포항까지는 고작 500m다.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도 되는 거리다. 왜 안 걸어 갔냐고 묻는다면, 그 500m는 한여름에 걷기엔 볼 것이 너무 없는 그저 그런 마을이기 때문이라고 답해야겠다. 단층짜리 주택이 이어져 있고 간혹 흑염소집, 원룸텔, 허름한 슈퍼마켓이 사이사이에 끼어 있다. 여객터미널 앞에도 횟집 너덧 개 있는 게 다다. 게다가 여객터미널은 ‘항구’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별과 만남의 서정과 거리가 너무 멀다. 신도시에 있는 성도 3만 명짜리 초대형 교회처럼 생긴 그 건물에선 찬송가 가락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목적지에 가도 볼 것이 없고, 목적지까지의 길에도 볼 것이 없으니 가볼 필요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내 먼 기억 속의 목포항은 조금 다르다. 20년 전 제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목포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여기저기서 뱃고동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부두에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잔뜩이었고, 배 안에서 먹을 먹거리를 파는 노점들이 호객에 열심이었다.
여러모로 내게 목포는 거적때기로 본색을 숨긴 손석구다. 구 화신백화점만해도 그렇다. 보기 드문 기둥식 철근콘크리트 건축물로 교차로 쪽으로 난 건물 입구와 입구 2층의 아치형 창틀이 무척 아름답다. 그러나 내부는 본 적이 없는데, 갈 때마다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역사적인 건물이 다른 도시에 있었다면 관광객들이 아우성을 치며 서로 인스타그램 사진을 찍으려 난리를 쳤을 것이다. 인천만 가 봐도 알 수 있다. 개화기 때 지은 적산가옥뿐 아니라 적산가옥 흉내를 내어 최근에 지은 카페에서도 복고 빙수를 시켜놓고 사진 찍기가 한창이다. 목포가 얼마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인지는 맨홀 뚜껑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만호동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100여 년 전 목포부청의 인장이 새겨진 맨홀 뚜껑, 1940년대 서울시나 대구시의 상징이 새겨진 맨홀 뚜껑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목포는 좋은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수많은 개항 도시 중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세월의 거적때기만 덮어 쓴 유일한 도시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개발의 광풍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원도심의 인구가 줄고 공동화되어 개발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은 무척 아이로니컬하다. 나는 오히려 좋다. 사람이 없어서 좋다.
목포는 여름이다. 민어는 사시사철 맛있다고는 하지만, 하도 ‘여름 민어’라고들 얘기하니 이제는 세뇌를 당해서 여름에 먹어야 더 맛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여름에는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아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짜증이 더해지는데, 목포에는 사람이 없어 시원하고 좋다. 다만, 더 시원해졌다가는 이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최근에 갔던 목포에선 저녁 식사 시간에 횟집에 사람이 너무 없었다. 목포의 도시재생사업들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어서 속도를 내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왜 목포가 좋을까? 목포에는 다른 도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정조가 있어서가 아닐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목포의 중년 여성들은 H&M이나 자라에서 일상복을 사지 않고, 정구호의 구호에서 외출복을 사지 않는다. 단골 양장점에서 몸에 맞게 맞춤한 옷을 입고 양산을 들고 거리를 걷는다. 목포의 중년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햇볕이 내리쬐는 곳을 다닐 때면 모자를 쓰고, 실내에선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나 옆자리에 곱게 놓아둔다. 1927년에 개업해 1년 반 전에 폐업한 갑자옥 모자점이 목포에서 근 100년의 세월을 버텨낸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인구 20만, 그중 대부분이 신도시에 사는 목포의 원도심에 아직 맞춤 양장점이 여럿 영업중인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맞춤복 치마에 블라우스를 입고 양산을 쓴 여자와 여름 정장에 모자까지 쓴 남자가 거리를 걷는 장면은 마치 반세기 전의 모던 걸, 모던 보이를 보는 듯한 감상 어린 착시마저 만들어낸다.
그러나 목포에서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아직도 본가가 목포에 있는 한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하자 “그건 그냥 백화점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나이든 남자들이 모자를 쓰는 건 서울도 비슷하지 않나요?”라고 반문했다. 신파에 가깝게 목포의 아름다움에 젖어 있는 나의 감성에 지나치게 이성적인 대답으로 찬물을 끼얹는 그가 살짝 미워지기까지 했다.
어쩌면 나는 목포의 신파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목포는 전성기에도 신파를 노래했다. 목포를 대표하는 가요 ‘목포의 눈물’이 탄생했을 때 즈음이 이 도시의 전성기였다. 1930년대 중반에 인구 6만을 돌파한 목포는 부산, 인천과 함께 전국 3대항이었고 6대 도시(서울·부산·평양·대구·인천·목포)에 속했다. 그러나 일본인과 조선인의 형편이 달랐다. 일본인 8,000명이 40만 평의 토지를, 조선인 5만 명이 80만 평의 토지를 소유했다. 고석규 전 목포대 총장의 책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공간·문화'에 따르면 목포로 몰려든 조선인 청년들은 생선 장수·지게벌이, 여자는 떡장사·고구마 장수로 내몰렸다. ‘목포의 눈물’의 신파는 그냥 신파가 아니다. 이런 한이 쌓여 ‘삼백연 원앙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가사로 드러났다. 해당 가사의 본디 의미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목포와 관련한 대중 가요들은 하나같이 처연한 가락의 트로트였다. “구슬픈 고동소리 남겨 놓고서 떠나간 그 사람은 어데로 가고. 삼학도 동백꽃은 누굴 위해 피었는가”라는 가사는 목포 출신 트로트 가수 남진의 ‘목포의 연가’ 일부다. “정들은 목포항을 이별하고서 떠나온 지 어연간 몇몇 해인가. 굽이굽이 흐르는 영산강, 우뚝 솟은 유달산. 어느 때나 다시 보리 그리운 목포 항구”라는 가사는 조미미의 ‘떠나온 목포항’ 일부다. 이미자의 ‘유달산아 말해다오’는 “그리움을 못 잊어서 천 리 길을 왔건만. 임들은 어디 갔나 다 어딜 갔나. 유달산아 말해다오 말 좀 해다오“라고 노래한다. 목포의 노래들은 하나같이 헤어진 사람을 그리워하며, 삼학도의 동백꽃을 탓하거나 아무 말 없이 서있는 유달산을 꾸짖는다.
내겐 서울 출신으로 2년간 목포에 내려가 바를 경영해 본 친구가 있다. ‘달수’라는 예명의 그 친구와 나는 목포의 신파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다. “그런데 목포에는 확실히 사람의 슬픈 감정을 증폭시키는 뭔가가 있어요.” 달수가 뭔가 엄청난 비밀이라도 있다는 듯 얘기를 꺼냈다. “저 원래 잘 우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목포에선 여름이 끝나버리는 게 너무 슬퍼서 자전거를 타다가 운 적이 있어요.” 나는 달수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그녀가 무서워졌다. 여름이 끝나는 게 슬퍼서 자전거를 타다가 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평생 비밀로 해야하는 게 아닌가? 그런 내밀한 감정을 비밀로 할 수 없어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는 게 아닌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게 달수는 자세한 내막까지 시시콜콜 공유하기 시작했다. “목포에 있을 때 목포대교가 보이는 인적 없는 해안가에 나만의 비밀 장소가 하나 있었어요. 새벽에 가게를 닫고 자전거를 타고 종종 가곤 했어요. 8월 말이었나? 자전거를 타고 제 비밀 장소 근처를 지나가는데, 서늘한 바람 한 줌이 제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어요. 여름을 좋아하는데, 그건 분명한 가을의 바람. 갑자기 감정이 와락 올라오더니 눈물이 흘렀어요. 여름이 가는 게 너무 슬펐던 거죠. 저 역시 갑작스러운 눈물이 너무 신기해서 그 소리를 녹음까지 해놨다니까요.” 달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울음 소리를 녹음한 파일을 내게 보내줬다. 물론 나는 그걸 듣지 않았다. 먼 훗날 정말 힘든 일이 있을 때 들을 예정이다. “여름아 가지마”라고 바람결에 속삭이는 달수의 목소리를 상상해 본다. 나 역시 여름을 좋아한다. 어쩌면 내게도 떠나는 여름이 너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목포에서라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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