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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참상" 유럽 대홍수 1년...땅은 오염되고 무너진 다리·학교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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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매캐한 냄새가 났다. 지난 5일 오후(현지시간) 방문한 독일 아르(Ahr) 중·고등학교(김나지움). 지난해 유럽 대홍수의 흔적으로 벽과 천장이 부서져 전기배선이 드러나 있었다. 2층으로 가는 계단 벽은 물이 차오른 높이만큼 반토막이 났다.
그런데 홍수와 냄새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자동차, 난방시설에서 나온 휘발유로 인한 오염의 냄새였다. 홍수로 물에 잠겼다 드러난 세상은 이전과는 달랐다.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고, 지역 경제를 이끌던 와인 생산도 초토화됐다.
한국일보 기후대응팀은 유럽 대홍수 1년을 맞아 독일 서부 라인란트팔츠주의 아르계곡에 위치한 바트노이에나르아르바일러시와 알트너군 등을 지난 5~7일 방문했다.
지난해 7월 중순, 독일 서부를 비롯한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일부에 ‘1,000년 만의 대홍수’라고 불릴 만큼 큰 물난리가 났다. 수일간의 폭우로 일부 수위는 약 7~9m까지 올라갔다. 아르계곡 지역은 7월 14일 밤부터 약 3일간 연이은 폭우에 134명이 사망했던 곳이다. 유럽 전체 사망자 약 240명 중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 재앙의 원인은 한국도 피해 갈 수 없는 기후위기 때문으로 결론이 났다.
강에서 불과 30m 떨어진 곳에 살던 티노 로씨(71)씨의 집은 말 그대로 폐가가 됐다. 당시 집 3층까지 물이 차올랐다. 2층 침실의 천장과 벽은 물이 휩쓸고 가면서 모두 벗겨져 있었다. 화장실 역시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마치 폭격을 맞은 현장 같았다. 부모님과 자신, 그리고 자녀까지 3대의 사진을 한데 모아둔 액자도 진흙에 파묻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됐다.
로씨씨는 “그날 위험을 직감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딸 집으로 대피했지만, 이웃들은 그러지 못해 지붕 위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헬기로 겨우 구조됐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물난리 속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도망쳐야 했다. 건축가인 로씨씨는 “컴퓨터와 파일로 45년간 정리해 왔던 나의 작업 기록이 완전히 날아갔다”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덧붙였다.
로씨씨를 비롯해 많은 이재민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집이 워낙 많이 훼손돼 재건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60여 가구는 갈 곳이 없어 컨테이너에서 버티고 있다. 일부 주택은 강에 너무 가까이 있거나, 물과 섞여 밀려온 휘발유로 심하게 오염돼 아예 재건이 불가능하다.
이 지역의 부상자는 766명이며, 지역 인구 약 12만 명 중 14%에 달하는 1만7,000명이 집을 잃었다.
지역 공동체의 소중한 추억도 함께 사라졌다. 아르 김나지움에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학생들이 자신의 그림을 붙여 놓았던 벽이 있다. 교장인 헤리버트 실러씨는 “졸업생들이 부모가 되어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며 함께 벽을 확인하고 즐거워했다”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은 보기 어려워졌다”고 아쉬워했다.
라인강의 서쪽 지류인 아르강을 따라 형성된 이곳은 와인산지로 유명한 농업 지역이다. 평온한 자연환경에 온천도 발달해 은퇴자는 물론 많은 여행객이 찾던 곳이다.
그러나 기자가 찾은 거리에는 관광객 대신 재난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한때 여행객을 싣고 나르던 다리와 터널은 반토막 난 채 강 위에 방치돼 있었다. 지역 경제를 이끌던 와인 생산도 초토화됐다. 와이너리 65곳 중 5곳 빼고 모두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독 세계 곳곳에서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이 많이 발생했지만 유럽 홍수의 피해액은 그중에서도 두 번째(430억 달러·약 51조 원)로 컸다. 영국 자선단체인 크리스천에이드의 조사 결과다. 가장 피해가 컸던 건 미국 허리케인 아이다(650억 달러·약 77조 원)였다.
재건에 필요한 비용도 문제다. 지역 주민의 3분의 2 정도는 재해보험이 있어 보험금으로 재건을 준비 중이다. 계곡 지역이라 수년에 한번씩 홍수가 났던 터라 미리 대비한 경우다. 하지만 피해규모가 워낙 커 보험금이 나와도 복구비용으론 부족하거나 지급이 거절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보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연방 정부가 건축비의 80%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독일 연방 내각이 결의한 수해지원예산 300억 유로(약 40조 원)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재민이 직접 재건 계획을 세우고 상세한 비용 추계를 해서 제출해야 겨우 초기자금(건축비의 20%)이 지급되는 터라 어려움이 많다. 주민 마크 크루젠버그씨는 “이재민 중에 노인이 많은 데다 수해로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이런 문서들을 준비하는 것을 버거워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이재민을 돕기 위해 나선 자원봉사자들 덕에 재건은 더디게나마 진행 중이다. 7일 한 가정집 보수공사 현장에서 랄프(52)씨를 만났다. 아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그는 안전용 마스크와 소음차단 헬멧을 쓰고 드릴로 오염된 벽을 부수고 있었다.
그가 속한 봉사단체 DZN에 따르면, 집주인은 홍수로 인한 트라우마가 심해 재건작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친척 한 명이 지하실에 있다가 물에 잠겨 사망했기 때문이다. 랄프씨는 “힘들어하는 이재민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독일 북부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다”며 “아들까지 데리고 온 건 기후재난의 현장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역의 재건은 현재 전체적인 설계를 논의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다시 홍수가 나도 공공 시설물이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계획에만 수개월이 소요되고 있다. 알트너군의 뤼디거 퓌어만 군수는 “놀이터 하나를 다시 짓더라도 똑같은 자리에 두면 물에 잠기기 때문에 더 높은 부지를 선정해야 한다”며 “관공서나 커뮤니티센터 등 모든 건물을 다시 디자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런 대책도 ‘평범한’ 홍수에 대한 대비책일 뿐이다. 주민들이 '쓰나미, 해일'이라 부를 정도로 컸던 지난해 정도의 홍수가 다시 발생한다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지자체와 시민들 모두 고민하는 지점이다.
2021년 홍수는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이라는 것이 과학자들와 독일 정부의 결론이다. 홍수 약 한 달 뒤 다국적 과학자 네트워크인 ‘세계기후원인(WWA)’은 “평균 기온 상승으로 인해 서유럽에 폭우가 내릴 확률이 1.2배에서 9배로 증가했고, 강수량도 3~19%로 늘었다”는 분석을 내놨다. “인간활동에 의한 기후변화”가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재건과정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부분의 주민이 공감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마을 곳곳에서는 지열 등 재생에너지를 이용한 히트펌프로 지역난방 시스템을 바꾸기 시작했다. 기존에 이 지역은 주로 석유 난로를 사용했지만 홍수 때 흘러나온 석유로 집이 오염되는 등 단점이 부각됐다. 1만5,000여 대의 차가 떠밀려 오면서 흘러나온 휘발유와 함께 마을 곳곳을 오염시켰다.
목수인 토마스 넬레씨는 “당시 피해가 워낙 컸던 데다 ‘기후변화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공감대가 커지면서 주민들 생각도 많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난방 전환은 라인란트팔트주의 에너지청에서 주관하고 있다. 담당자인 폴 나한 박사는 “새 시스템이 아직 생소하기 때문에 수차례 주민 설명회를 열었다”며 “히트펌프가 탄소배출이 없는 지속가능한 난방이라는 설명을 듣고 주민의 70~80% 정도가 찬성했다”고 말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가가 급등한 것도 인식 전환에 일조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주민들이 원하는 평범한 삶은 보다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이 없이는 요원해보인다. 크루젠버그씨는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어떤 면에서 정상이 됐다”면서도 “비가 와도 걱정에 떨지 않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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