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오래된 무채색 다가구 주택건물이 숲처럼 모여 있는 서울 강동구 천호동. 골목길을 지나다보면 단정하게 자리한 회백색 벽돌집을 만난다. 노트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의 손영일(39) 소장이 직접 지어 반년째 살고 있는 집이다. 건축가 남편과 아내 이유라(40)씨가 지은 첫 집이자 이들 부부, 아들 라영(4), 이씨의 어머니가 말 그대로 '따로 또 같이 사는' 집이다.
2년 전 아파트 전세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던 손 소장 부부는 다시 전세족이 될 바에 손수 집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급하게 매물을 검색하다 운명처럼 현재 집터를 만났다. 트럭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좁은 앞길을 면하고 있는 12평 부지에 지을 집의 목표는 단순했다. 가족에게 딱 맞는 공간을 '위로' 올려 쌓는 것. 그렇게 건축면적 40㎡(약 12평)에 연면적 114.7㎡(약 35평), 높이 12.85m의 좁고 긴 4층 주택을 세웠다. 4인 가구의 맞춤 공간을 층층이 끼워 넣고 포켓 정원과 옥상 테라스, 숨겨진 다락방까지 야무지게 갖췄다.
"아이의 꿈은 천장의 높이만큼 자란다"
대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부는 과감한 실험을 감행했다. 집의 골조가 완성됐을 무렵, 남편은 원래 설계안에 들어 있던 방 세 개 중 하나를 없애 천장을 오픈하자고 제안했다. 답답한 시야를 수직으로 확보하기 위한 한 수였다. 2층 거실과 맞붙은 방 한 칸을 포기했더니 4층 천장까지 시선이 닿았다.
완성된 2층 천장의 높이는 5m. 아파트의 평균 층고인 2.3m의 두 배다. 천장이 시원하게 뚫리면서 집의 체감 스케일이 커졌다. 손 소장은 "수평 공간은 벽이라는 한계가 있으니 수직 공간의 가능성을 믿고 층고를 확 높였다"며 "아파트에서 느낄 수 없는 시각적 깊이를 몸으로 느꼈으면 했다"고 말했다. 높은 층고와 다양한 레벨의 계단은, 누구보다 네 살 라영이가 좋아했다. 아내는 "목의 움직임이 상하좌우로 다양해지고 공간을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시각적 자극을 받는 것 같다"며 "아이 꿈의 크기가 천장에 비례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며 웃었다.
높은 천장에 계단의 변주를 더하니 공간감은 더욱 깊어졌다. 건축가는 한쪽 면에 조성된 계단실을 집의 포인트로 삼았다. 무거운 느낌의 노출 콘크리트 벽과 결이 다른 철재 난간을 써서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지도록 하고, 너비는 성인 두 명이 앉을 만큼 여유롭게 만들었다. 작은 집일수록 공간을 아끼기 위해 계단을 좁고 높게 만드는 것과는 정반대다.
손 소장은 "위아래를 쉴 새 없이 오르내릴 가족들의 수고를 덜어주고 때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했다"며 "안전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머무르는 동안 다양한 풍경을 담을 수 있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계단을 무서워했던 아이는 이제 적극적으로 활동범위를 넓혀가며 각 층을 관찰하거나 편안한 자세로 앉아 책을 읽기도 한다.
'따로 또 같이' 누리는 일상
공간은 철저히 가족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구획됐다. 1층엔 가족과 방문객이 사용하는 현관과 부엌, 2층은 거실 공간과 어머니 침실, 3층은 세 가족의 침실, 4층은 부부의 작업실을 배치했고 오픈된 수직 계단으로 동선을 이었다. 어른들이 각자 공간에서 할 일을 하면서도 아이를 돌보거나 다른 층에 있는 가족과 소통할 수 있는 구조다.
2층 거실은 가족들이 위아래 흩어져 있다가 모이는 중간 지대다. 수직으로 쌓인 공간들의 중심 축이자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완충 역할을 한다. 높은 층고와 다양한 창으로 채광을 확보해 아이가 장난감을 늘어놓고 시간을 보내거나 가족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왔다. 2층 침실은 폴딩 도어를 달아 필요시 넓게 활용하도록 했고, 3층 침실엔 거실을 향하는 창을 달아 외부 공간과 연결했다.
4층은 벽 없이 계단과 한 공간으로 트여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 아래층과 분리했다. 독서와 음악을 즐기는 부부는 이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부부 아지트의 벽면은 다른 공간과 달리 푸른색 톤의 벽으로 마감해 활기를 불어넣었다. 손 소장은 "집 전체가 소리와 공기가 통하는 열린 공간이면서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어야 했다"며 "가족 개개인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상상한 집을 현실로 구현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매력이 숨어 있는 집
가족의 첫 집인 만큼 취향을 담을 공간도 꼼꼼하게 챙겼다. 마당을 두고 식물을 가꾸며 시간을 보내는 주택살이를 꿈꿨던 아내를 위해 남편은 1층 코너를 과감하게 잘라 삼각형의 포켓 정원을 꾸몄다. 외부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외벽을 높게 올려야 했지만 햇살과 식물, 바람을 느끼기에 충분한 공간이 됐다. 이씨는 "햇살과 초록 식물들이 집의 분위기를 포근하게 만들어준다"며 "정원을 볼 때마다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고 했다.
4층의 자투리 공간을 사다리로 연결해 완성한 다락도 아내를 위한 남편의 배려다. 평소 자신만의 취미에 몰두하는 아내에게 선물 같은 공간이 됐다. 계단 벽에 창을 내 이웃의 오래된 감나무로 차경을 연출한 것도 이 집의 숨은 재미다. "계절마다 변하는 나무의 모습이 작은 집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지루함을 덜어주고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또 하나의 가족실이라고 할 수 있는 야외 테라스는 이사온 지 반년 만에 이 가족이 가장 애정하는 공간이 됐다. 테라스에 야외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가족끼리 혹은 지인을 초대해 아파트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빛과 바람을 마음껏 즐긴다.
안에서 사통팔달인 건물은 겉에서 보면 과묵하기 그지 없는 인상이다. 담을 따로 만드는 대신 노출 콘크리트 위에 회백색 벽돌을 얹어 차분하고 묵직한 표정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전봇대와 인접한 외벽의 한 귀퉁이는 둥그렇게 돌리고 그 구석과 도로변 창에 키가 큰 대나무 화분을 배치해 이웃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이 집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앞으로도 담백하게 어필하려고 해요. 그러면 집도, 골목도 점점 자기다운 모습으로 풍요로워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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