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아베

입력
2022.07.12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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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총격을 당한 일본 나라현 나라시 야마토사이다이 지역 앞 교차로 근처에 마련된 헌화대에서 지난 10일 오후 시민들이 합장하고 있다. 아베 전 총리는 8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유세를 하던 중 총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나라=교도 연합뉴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총격을 당한 일본 나라현 나라시 야마토사이다이 지역 앞 교차로 근처에 마련된 헌화대에서 지난 10일 오후 시민들이 합장하고 있다. 아베 전 총리는 8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유세를 하던 중 총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나라=교도 연합뉴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장례식 쓰야((通夜·망자의 유해를 지키며 밤을 지샘)에 2,500여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상주인 부인 아키에 여사는 가족장으로만 치른다 했지만 11일 밤 도쿄타워 인근의 사찰 조조지에는 정·재계 인사와 외국인, 일본 시민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일본 최고의 현역 거물 정치인이 시민들이 거리유세를 지켜보던 와중에 지난 8일 피격 사망한 충격은 가시지 않고 있다.

□ 아베는 8년 9개월간 역대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다. 실제 위상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에 비견될 정도다. 다나카는 재임기간은 2년이 좀 넘지만 막후에선 1980년대 초 ‘야미쇼군(暗將軍)’으로 불렸다. ‘밤의 대통령’이다. 그의 도움으로 총리가 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내각 인사를 대부분 상의해야 했다. 소속 의원을 100명에 가깝게 거느린 최대 파벌 수장이라 '상왕'으로 군림한 탓이다. 아베가 이를 재현했다. 98명의 자민당 제1파벌 호소다파로 돌아가 직접 회장이 되면서, 제4 파벌을 거느린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 아베는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일본인’ 반열에도 회자됐다. 2007년 3월 5일 참의원 답변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 “관헌이 집에 들어가 납치하듯 끌고 나오는 강제성은 없었다”고 밝혔다. ‘협의의 강제성’은 위안부 문제 자체를 거부하는 일본 보수파의 논거가 됐다. 이런 증거를 입증하는 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기계적인 태도가 일본의 공식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이 말하는 것은 모집(동원)과 이송, 위안소 운영과 관리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 강제성’이다. 반인륜적 범죄를 설명하기에 이미 충분한 것이다.

□ 아베는 자민당 총재로서 6차례의 중·참의원 선거를 전승으로 이끌었다. ‘1억 총활약 사회’ 같은 구호와 ‘프레임 전쟁’에도 능했다. 그래서인지 ‘징용공’ 대신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위안부 소녀상’ 호칭을 없애고 공식 명칭을 ‘위안부상’으로 바꿨다. 소녀상은 식민지의 어느 소녀가 끌려가는 장면을 선명하게 연상시킨다. 그 위력을 깊이 이해했을 터다. 일본 정계 거인이, 그가 숭상했던 메이지유신 지사들처럼 비극적인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아베는 이제 전설이 됐다.

박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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