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피격 사망 한일관계 차질 불가피
조급함 버리고 일본에 사과 요구해야
배상 해법엔 피해자 설득 ‘용기’ 내야
비열한 테러로 유명을 달리한 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명복을 빈다. 고인의 부재(不在)는 윤석열 정부의 적극적 화해 의지에 따라 전환 국면이 기대됐던 한일관계에도 적잖은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적어도 일본 참의원 선거와 우리나라 광복절, 그리고 2개월 앞으로 닥친 일본기업 자산 현금화 등의 일정을 의식하며 한일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조속히 열려던 우리 정부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는 얘기다.
국내에선 강경파로서 후임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 내각의 강제징용 문제 해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고인의 부재가 한일관계를 유연하게 풀어나가는 데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기대도 없지 않다. 반면, 고인의 피격 사망이 일본 내 우익 결집효과를 빚어 되레 강경론을 증폭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찮다.
자민당의 참의원 선거 압승 직후 기시다 총리가 “가능한 빨리 개헌을 발의하겠다”고 나선 건, 강제징용 문제에서도 일본이 더 유연한 자세로 돌아서기가 쉽지 않다는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로서는 일정에 쫓겨 조급하게 일본 상황에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문제를 풀어 나갈 합당한 해법을 마련하기 위한 우리 나름의 원칙과 준비를 제대로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사상 최악인 한일관계 정상화의 출발점으로 1998년 ‘김대중ㆍ오부치 선언’을 설정했다. 당시 선언의 핵심은 ‘일본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한국은 흔쾌히 화해한다’는 구도다. 이 구도에 따라 오부치는 보수 자민당 총리로는 처음으로 ‘통렬한 반성과 사죄’라는 진전된 문구로 과거사를 사죄했고, 김 대통령은 ‘화해’라는 표현으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에 이정표를 세웠다.
선언을 관계 정상화의 기점으로 삼자는 접근법은 한일 양국의 조야에서도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미 전 정부 때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나 문희상 전 국회의장의 해법이 나온 상태이고, 최근 재개된 한일재계회의에서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는 선언의 회복이 관계 정상화의 정답이라는 데 우리 측과 뜻을 함께하고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문제는 강제징용 문제에서 어떻게 선언의 정신에 맞는 해법을 강구하느냐다. 선언 당시 정신으로 돌아가면, 일본은 우선 한일 ‘화해’의 전제였던 ‘반성과 사죄’의 진심을 보여야 한다. 일례로 강제징용 기업 중 하나인 미쓰비시(三菱)는 지난해 11월 나가사키의 한 공원에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 추도비를 건립하고 ‘통절한 반성과 심심한 사죄’까지 비명으로 각인했다. 반면, 한국인 피해자들에 대해선 1965년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만 고집할 뿐 반성과 사죄를 외면하고 있으니, 그게 진심으로 수용될 리 만무다.
우리 역시 능동적 접근이 긴요하다. 사실 선언의 진정한 가치는 일본의 사죄 표명보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라는 실질조치로 기꺼이 일본에게 손을 내민 김대중 정부의 결단이다. 그리고 그런 결단이 지금 세계를 주름잡는 K팝과 K카툰 등 문화 한류의 중요한 동력이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징용문제 해법에서도 국내 상ㆍ하급심의 상충된 판결 등을 감안해, 피해자 배상을 징용기업에 대한 법적 강제로 풀어야 한다는 경직된 인식을 재고할 필요가 크다.
아울러 일본 기업들의 사죄를 전제로, 피해자 배상은 더 이상 일본이나 징용기업들을 간여시키지 않고 우리 정부와 사회가 독자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원칙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일본에 진심 어린 조치를 당당히 요구하되, 피해자를 설득하고 일본을 포용하는 김대중ㆍ오부치 선언의 ‘용기’를 계승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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