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지구가 양극단으로 갈려 으르렁거리던 냉전시절의 일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 문화예술의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국제 콩쿠르를 새로이 창립한다. 이름도 국민 음악가인 '차이콥스키'를 붙여 자긍심을 드러냈다. 클래식 음악계의 세계 질서를 러시아가 몸소 선도하겠다는 야심찬 포부였다. 그런데 콩쿠르의 첫 발걸음부터 꼬여버린다. 적대국인 미국, 그것도 텍사스 '깡시골' 출신의 청년이 혜성처럼 등장해 경연 판도에 균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의 압도적 연주는 꽁꽁 얼어 빗장을 단단히 잠근 소련 청중의 마음을 일거에 녹일 만큼 예외적 열광을 가져왔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소련 국적의 참가자를 우승시키라는 압박에 공공연히 휘둘렸지만 거장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는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 적대국의 시골 청년에겐 만점을, 나머지 참가자들에겐 빵점을 매겨 정치와 음악성이 무관하다는 진리를 용기 있게 시위한다.
우승자를 선정하기 직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고가 올라간다. 흐루쇼프는 몇 번이고 되묻는다. '진정 미국의 청년이 최고인가.' 결국 서기장 재가를 얻어 텍사스 피아니스트가 소비에트의 관제적 경연에 우승자로 호명된다. 공산주의 심장부에서 그가 이룬 쾌거는 세속적 우승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예술은 정치적 국경과 문화적 장벽을 초월한다는 것, 냉전의 한복판에서도 평화적 상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의 첫 출발에 각별한 의미를 새긴 텍사스 시골 청년은 얼마 전 임윤찬이 우승을 거두며 한국인에게도 익숙해진 이름, 바로 그 '반 클라이번'이다.
이번에 열린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도 예술이 정치를 초월한다는 진리를 거듭 일깨워주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곳곳의 무대에서 러시아 음악가들이 퇴출되고, 차이콥스키 콩쿠르마저 세계 연맹에서 회원자격을 박탈당한 와중이었다. 하지만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러시아 음악가들의 참가를 허용하며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러시아 경제 제재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미국을 대표하는 콩쿠르인데도, 그래서 러시아 국적을 보이콧하라는 압력이 만연한데도, 반 클라이번은 빗장을 잠그지 않았다. 젊은 음악가들에겐 어디에서건 차별받지 않을 무대를 제공해야 하며, 예술이 정치에 매몰되지 않았던 반 클라이번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임윤찬을 포함해 결선에 진출한 6인의 국적은 그런 의미에서 더더욱 흥미로웠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그의 동맹국인 벨라루스, 그리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등 2022년의 혼란한 세계 정세가 반영된 듯한 구성이었다. 이번 콩쿠르가 만약 정치 명분에 기울었다면 우크라이나 참가자 드미트로 쵸니를 우승시켜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내세웠을지 모른다. 혹은 애국적 흥행에 휘둘렸다면 미국 국적의 클레이튼 스티븐슨에게 우승 메달이 돌아갔을 것이다.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르네상스형 음악가인 데다 아프리카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중국계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눈물겹게 성장한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적인 스토리를 구비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임윤찬은 정치적으론 불리한 여건이었다. 직전 대회 우승자도 한국인이었는데 같은 국적의 연주자를 연이어 우승시키는 건 콩쿠르 입장에선 금기에 속한다.
결과는 정치적 분별없이 음악이 최우선이었다. 임윤찬의 우승에 이어 러시아가 2위, 우크라이나가 3위로 연이어 호명되었고 미국 참가자는 입상권에 들지 못했다. 출신 국가에 대한 편견은 통하지 않았다. 부당한 비난도, 과장된 격려도 없이 오직 음악만이 용납되었다. 극한의 전쟁 상황에서도 국적과 무관하게 선의의 경쟁을 펼쳤던 이번 경연은 예술을 통한 평화로운 화합을 현현히 시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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