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때 전국 대학들이 의과대학 유치에 사활을 걸었었다. 의대만 있으면 대학이 멀리 지방의 어느 산자락에 숨어 있어도 서울대 웬만한 학과 합격선을 넘는 성적 우수학생들을 모을 수 있는데다, 대학 평판도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요즘 대학들 사이에선 취업이 거의 보장되는 반도체학과 정원 증원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지방에서는 국토균형발전 차원에서 지방대에 정원 쿼터를 더 줘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반도체학과 정원 경쟁이 붙은 건 윤석열 정부가 반도체 인력양성을 국정과제로 추진하면서다. 한국은 메모리반도체 부문에서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그건 전체 반도체산업의 일부일 뿐이다. 반도체 생산은 우선 특정 기능을 갖춘 제품 수요가 발생하면, 팹리스라 불리는 전문 설계회사들이 용도에 맞춰 반도체를 설계하는 데서 시작된다. 반도체는 기능별로 크게 정보저장용인 메모리반도체와 정보처리용인 비메모리, 즉 시스템반도체로 나뉜다.
□ 다음 단계는 설계대로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 회사 차례다. 팹리스가 제품 기획사라면, 파운드리는 일종의 하청 제조사인 셈이다. 바로 이 부문에서 삼성전자 등이 대만 TSMC와 나노미터를 따지는 치열한 초미세공정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메모리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릴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미국 일본 등 기술선진국들이 공급망 강화 차원에서 파운드리 구축에 나서고 있고, 중국도 턱밑까지 추격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 우리도 이젠 보다 생산성이 높은 팹리스와 시스템반도체를 육성해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게 됐다. 특히 향후 일반화할 소량다품종 반도체 생산체제를 갖추려면 무엇보다 설계인력이 절실한데, 이런저런 필요인력만 따져도 장기적으로 석ㆍ박사급 3만 명, 설계실무자 5만 명 정도이기 때문에 학과 증원이 시급해진 것이다. 다만 대학 반도체학과 증원은 향후 미래산업의 국토 내 입지를 좌우하는 만큼, 균형발전을 위해서라도 수도권 대학 증원은 신중할 필요가 크다. 서두르되, 멀리 보며 지역에도 미래산업이 입지할 수 있는 정책이 강구돼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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