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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전범'으로 당장 처벌 어렵지만… 커지는 정치적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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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어느 나라이든 역사에서 영토를 확장시킨 인물은 추앙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소련 해체 뒤 러시아 영토를 넓힌 유일한 정치인이다. 우크라이나만 두 차례 침공해 크름(크림)반도를 병합했고 남부 흑해지역 점령에도 성공했다. 이대로라면 푸틴은 러시아 역사에서 높이 평가되겠지만 성사 여부는 미지수다. 무엇보다 푸틴이 넘기 힘든 벽은 국제형사재판소(ICC)를 비롯한 전쟁범죄 법정이다.
국제법상 전쟁은 불법적 무력행위이고, 전쟁을 일으킨 인물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45년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전범이 처벌된 적은 물론 없다. 전쟁 중 한쪽 당사자를 재판에 넘기는 것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푸틴이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전쟁을 일으킨 푸틴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국제 여론은 어느 때보다 비등하고, 단죄를 위한 사법 체계도 완비돼 있다.
국제사회는 푸틴 처벌을 위해 전례 없이 협업 조사를 전개하고 있다. 러시아 ‘국가’의 전쟁범죄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다뤄지고 있다. 국가 간 범죄행위를 다루는 ICJ는 우크라이나의 분쟁소송 신청에 대해 지난 3월 즉각적인 군사작전의 중단을 러시아에 명했다. 이번 사태의 러시아 책임을 인정한 첫 법률적 판단이었다. 푸틴을 비롯한 러시아 지도자들의 전쟁범죄 조사의 중심은 ICC다. ‘개인’의 전쟁범죄를 추적해 처벌하는 ICC는 이번에야말로 이름값을 할 기회로 여기고 역대 최대 규모의 조사팀을 우크라이나에 파견했다. 외신들도 푸틴과 러시아를 전범으로 법정에 세울 절호의 기회라는 분석을 전하고 있다.
푸틴을 ICC 법정에 세우려면 범죄혐의 입증에 앞서 적법한 조사를 위한 까다로운 사전 절차를 거쳐야 한다. 먼저 ICC 수사대상인지 따지는 관할권 문제인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처럼 비회원국은 스스로 관할권을 인정하면 가능하다. 우크라이나는 2013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침공 이후부터 두 차례 정식 조사를 요청, 관할권을 인정한 상태다. 우크라이나에서 자행된 2013년 11월 이후 전쟁범죄는 ICC 조사대상이고 처벌도 가능한 것이다.
관할권이 인정되면 정식조사 착수를 위해 예비심사를 거치는데 문제는 최종 승인까지 수개월이 걸리는 점이다. ICC의 카림 칸 소추관(수석검사)은 이를 우회하는 수단을 동원했다. 그는 사전조사에서 러시아군에 의한 반(反)인도 범죄와 전쟁범죄가 발생했다고 볼 합리적 근거가 있다며 회원국들에게 조사개시 승인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43개 회원국이 찬성입장을 내자 칸 수석검사는 지난 3월 2일 조사개시를 정식 선언했다. 전쟁 발발 6일 만에 푸틴과의 전쟁을 선언한 것인데 20년 ICC 역사에 이처럼 신속한 대응이 없었다는 점에서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푸틴 법정 세우기를 위해선 국가원수 면책 논란도 넘어야 한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가원수는 소추 대상이 아니라는 게 국내법 관행이다. 하지만 ICC는 2008년 당시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에게 다르푸르 사태 책임을 물어 체포영장을 발부한 전례가 있다. 국가원수의 면제권한이 인정되지 않는 국제법 관행상 푸틴도 예외일 수는 없다.
조사 개시를 위한 장애물이 사라진 만큼 남은 문제는 충분한 범죄증거 확보에 달려 있다. 이를 통해 푸틴을 범죄 용의자로 특정하면 체포영장을 발부하거나 소환을 통보할 수 있다.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현장은 수도 키이우 길목에 위치한 부차와 남부의 격전지 마리우폴 등에서 저지른 잔학행위다. 민간인 학살과 성폭행, 재산약탈과 함께 집속탄, 진공폭탄 같은 금지무기가 사용됐다. 부차의 처참함을 목격한 칸 수석검사는 “우크라이나는 범죄 현장”이라고 규정했다. 러시아는 무력행사가 거주 주민들의 자결권 보호를 위한 군사작전이라고 주장하나, 지금껏 드러난 행위들은 ICC 관할범죄에 해당되어 처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ICC가 다루는 범죄는 집단살해(제노사이드), 전쟁범죄, 반(反)인도범죄와 침략범죄의 4가지다. 집단살해죄는 통상 군부 지도자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국민, 민족의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그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일련의 행동을 말한다. 미국·영국과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은 푸틴과 군부 지도자들이 제노사이드를 범한 것으로 규정한 바 있다. 푸틴이 이를 직접 지시했다는 구체적 행위가 드러나면 적용할 수 있다.
반인도 범죄는 민간인, 주민에 대해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공격으로 살해, 강제이주, 고문 등을 한 경우다. 부차학살이 이에 해당하나 푸틴이 명령했거나 묵인했는지 등 구체적 증거가 확보될 필요가 있다. 전쟁범죄는 비적대 민간인 주민에 대한 고의 공격, 성폭행 등 인간 존엄을 유린한 사안 등에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ICC는 상대적으로 입증이 용이한 전쟁범죄 구성에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략범죄는 한 국가의 정치, 군사적 행동을 실효적으로 통제할 지위에 있는 사람이 침략행위를 계획, 준비, 실행한 것을 의미한다. 법률적 정의를 확립하기까지 10년 넘는 논의를 거쳐 2018년부터 적용했다. 이 때문에 침략범죄로 단죄된 사례는 아직 없지만 푸틴의 전쟁책임을 묻기에 최적의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4가지 범죄 중 어느 하나라도 물증이 확인되면 푸틴을 기소하는 데 장애는 없으나 문제는 ICC의 집행력이다. 집행력은 회원국 안에서만 인정되는 데다 이를 강제할 자체 집행기관도 없다. 푸틴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된다 해도 본인이나 당사국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만큼 집행이 불가능한 것이다. 지난 20년간 ICC의 유죄 판결이 5건에 불과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다르푸르 사태의 책임을 물어 2008년 수단 대통령 알바시르에게 발부된 체포영장은 아직도 집행되지 못하고 있다.
ICC 고유의 재판전공소사실 확인절차도 푸틴 법정 세우기의 어려움 중 하나다. 기소에 앞서 전심(예심)재판부와 검사, 피고인이 출석해 범죄증거가 충분한지 판단하는 절차다. 푸틴의 참석을 기대하기 어려워 재판 장기화는 불가피하고 직접 기소한다 해도 그를 당장 법정에 세울 가능성은 희박하다. 게다가 규정상 피고인은 재판하는 동안 출석해야 하는 만큼 푸틴이 없는 궐석재판도 불가능하다.
이런 비관론 때문에 유럽에선 아예 특별국제재판소를 신설해 푸틴을 비롯한 정치와 군사 지도자들을 침략범죄로 기소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해당국이 아니어도 보편적 재판관할권을 인정해 유럽에서 처벌하자는 것이다. 유럽의회는 특별재판소 설립을 위한 결의안을 이미 채택한 상태다. 국제사회는 옛 유고 지역과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발생한 집단학살에 대해 국제유고형사재판소(ICTY) 국제르완다형사재판소(ICTR)의 임시재판소를 운영한 전례가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한편으로 ICC에 협조하면서도 푸틴을 비롯한 러시아 지도자들과 병사들을 자체 기소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2만 건이 넘는 사례를 파악해 관련자들을 국제사회에 수배하거나 전범재판에 넘기고 있는데 러시아 병사 3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 인권단체들과 주요 국가들도 러시아, 푸틴의 전쟁범죄 증거 추적에 나선 상태다. 미국의 가세는 국제사법기구의 한계를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조 바이든 정부는 미군의 전쟁범죄 조사 문제로 불편했던 ICC와의 관계도 복원시켰다. 미 법무부는 러시아의 전쟁범죄조사팀을 별도 구성해 전범을 추적 중인데, 조사팀을 이끄는 엘리 로젠바움 전 법무부 특별수사국장은 나치 전범을 100명 넘게 잡은 ‘나치 사냥꾼’이다. 그는 “(러시아)전쟁 범죄자들이 숨을 곳은 없다”고 자신했다.
국제기구와 국제사회가 러시아와 푸틴의 전쟁범죄를 추적하는 것은 실효성을 떠나 잔혹행위와 전쟁 자체를 예방하는 효과가 크다. 당장 법정에 세우기 어렵지만 장차 재판에 회부될 가능성만으로 당사자들에겐 공포일 수밖에 없다. 푸틴을 비롯한 군부 인사들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면 그 자체로 정치적 압력이 크고, 향후 협상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구나 국제법에는 공소시효가 없어 종전 이후, 또는 푸틴의 실각 뒤에도 언제든 기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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