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도 안 받던 베트남, 이제 ○○페이면 '끝'...韓은행들도 디지털 시장 올인

입력
2022.07.07 04:30
16면

<52> 급변하는 베트남 금융 환경
VN페이로 배달도 가능...월 이용수 1500만 명 넘어
현지은행 디지털화도 촉진...한국 은행들도 '출사표'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근무 중인 한 직장인이 도심의 한 식당에서 VN페이를 이용해 음식값을 결제하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근무 중인 한 직장인이 도심의 한 식당에서 VN페이를 이용해 음식값을 결제하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코로나19 사태 이전, 베트남에 출장 혹은 여행을 갔던 한국인이라면 현금 계산만 요구하는 현지 시스템에 난감했던 경험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번듯한 외관에 최신식 시설을 갖춘 곳을 찾았더라도 별반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당당히 카드결제 대신 은행 계좌이체를 요구하는 현지 직원 모습에 "베트남은 아직 멀었다"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고집스럽게 지폐를 고집하던 베트남은 코로나19 사태를 지나면서 선택지를 하나 더 추가했다. 카드결제 단말기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VN PAY(베트남 페이)'라는 낯선 시스템을 배치한 것이다.

VN페이는 한국에서 이미 보편화된 '모바일 QR코드 결제 방식'의 베트남 대표 버전이다. 시스템 장착은 늦었으나 베트남의 QR코드 결제 이용 빈도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베트남은 연중 무더운 기후로 음식은 물론 생필품과 온갖 물건들도 배달하는데, 이젠 VN페이로 대부분의 배달서비스 결제가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VN페이를 만든 베트남페이먼트솔루션(VNG) 공동창업자 르딴(왼쪽) 대표가 2020년 하노이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베트남 국가 브랜드' 시상식에서 브랜드 인증 상패를 받고 있다. VN페이 홈페이지 캡처

VN페이를 만든 베트남페이먼트솔루션(VNG) 공동창업자 르딴(왼쪽) 대표가 2020년 하노이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베트남 국가 브랜드' 시상식에서 브랜드 인증 상패를 받고 있다. VN페이 홈페이지 캡처

VN페이의 존재감은 다양한 수치로도 확인된다. VN페이를 개발·보급한 베트남페이먼트솔루션(VNG)은 40개의 현지 은행은 물론 2만여 개의 기업과 제휴했으며, VN페이 월평균 이용 고객은 1,5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연간 거래건수도 2020년 이후 매년 3배 이상 증가하고 있다. 현 추세대로면 베트남 국민 대부분이 VN페이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얘기다.

VN페이의 놀라운 성장세에 글로벌 투자시장의 눈길도 베트남으로 쏠리고 있다. 지난 2019년 일본 소프트뱅크와 싱가포르 국부펀드(GIC)는 VNG에 3억 달러를 투자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디지털 그룹들이 VNG 지분 매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2007년 30대 초반의 르딴(46) 등 3명의 기업인이 공동창업한 VNG의 현재 시가총액은 17억 달러를 넘어섰다.

VN페이→모바일뱅킹→전자결제, 디지털 금융 '연쇄 성장'

5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 도심에 설치된 디지털 현금인출기(ATM)의 모습. 해당 ATM을 이용하면 은행 지점을 가지 않고도 새로운 통장을 바로 개설할 수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5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 도심에 설치된 디지털 현금인출기(ATM)의 모습. 해당 ATM을 이용하면 은행 지점을 가지 않고도 새로운 통장을 바로 개설할 수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VN페이의 성공은 베트남 금융산업 전반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코로나19 시대 이전 50%에도 미치지 못했던 베트남 은행 디지털뱅킹 이용률이, VN페이와 은행권이 본격적으로 결합한 지난해에는 83%까지 수직 상승한 것.

베트남 현지 은행인 비엣콤뱅크(VIETCOM BANK)도 폭증하는 디지털 수요를 재빠르게 흡수하기 위해 지난해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모바일뱅킹 이체수수료 무료'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많은 고객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수수료 지원 금액이 커졌지만, 그 고객들이 다른 은행 서비스도 이용하면서 결과적으로 수수료 손실 금액을 넘어서는 순이익을 남기게 됐다.

디지털 금융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명확해지자 베트남 중앙정부도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해 팜민찐 총리는 자신이 직접 '베트남디지털화위원회'를 구성해 중앙은행 및 시중 은행장들에게 디지털 전환 성과를 보고받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국가 디지털 전환 계획'도 마련해, 오는 2026년까지 현지 은행 거래의 70%, 영업장 업무의 50%를 디지털화할 것을 주문했다.

정부의 강한 의지에 베트남 은행권도 적극 호응 중이다. 현재 베트남 은행들은 주요 도시에 신분증만 있으면 모바일 통장을 바로 개설할 수 있는 '디지털 현금지급기(ATM)'를 확대 보급하는 데 한창이다.

베트남 금융권 관계자는 "지난해 기준, 베트남 전체 인구 9,700여만 명 중 휴대폰 등 디지털 기기 사용에 익숙한 30세 이하 인구 비중이 50%를 넘어섰다"며 "디지털에 익숙한 이들의 존재 덕에 모바일뱅킹에 기반한 전자결제 시장 역시 2025년 520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VN페이에서 시작된 베트남의 디지털 전환의 흐름이 금융산업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의 실패는 없다" 韓은행 베트남 공략 본격화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위치한 베트남 중앙은행(SBV)의 전경. SBV는 베트남의 디지털 금융 정책을 관리ㆍ감독하는 주무 관청이다. 베트남 정부 홈페이지 캡처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위치한 베트남 중앙은행(SBV)의 전경. SBV는 베트남의 디지털 금융 정책을 관리ㆍ감독하는 주무 관청이다. 베트남 정부 홈페이지 캡처

베트남에 이미 진출한 한국 은행들도 현지 금융권의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기득권에 안주하다 카카오뱅크에 한국 디지털 금융 시장의 주도권을 내준 뼈아픈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은행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디지털 금융 경험치도 최대 강점이다.

중국과 일본 등 경쟁국 은행들이 베트남 디지털 시장에서 도태된 점도 호재다. 베트남 정부는 최근 5년 동안 중국 대형 은행들의 현지 법인 설립은 고사하고 지점 및 사무소 개설조차 허가하지 않고 있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 외교 갈등은 물론, 막대한 자금력으로 토종 은행들까지 고사시키는 중국의 진출 방식에 베트남 정부의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 은행들은 직접 진출로 인한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베트남 은행 지분 매입을 통한 이익 창출에만 집중하고 있다. 현지에 진출해, 디지털 금융시장 공략 시점을 노리는 한국 은행들에는 큰 기회가 열린 셈이다.


5월 강규원 신한은행 베트남법인장이 호찌민에서 열린 '디지털 BIB 출범식'에서 현지 디지털 금융시장의 발전 상황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신한은행 베트남법인 제공

5월 강규원 신한은행 베트남법인장이 호찌민에서 열린 '디지털 BIB 출범식'에서 현지 디지털 금융시장의 발전 상황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신한은행 베트남법인 제공

내·외부 상황과 변수를 모두 파악한 한국 은행들은 마침내 올 상반기 디지털 금융 시장 공략의 칼을 뽑아 들었다. 선두에는 '베트남 내 외국계 은행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한은행이 섰다. 신한금융그룹은 지난 5월 베트남법인의 영업 구조를 오프라인 지점에서 디지털 중심 체제로 전면 전환했다. 현지 외국계 은행 중 가장 많은 43개의 지점을 보유하고 있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시장 접근 방식 자체를 바꿨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신한은행 베트남법인은 '은행 내 은행(Bank in Bank·BIB)' 조직을 신설해 축적된 디지털 역량을 빠르게 현장에 반영키로 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디지털과 모바일 우선 기조 아래 2,000만 명의 고객을 보유한 베트남 이커머스 기업 '티키(TIKI)'의 지분 10%를 최근 인수했다"며 "현지에 진출해 있는 배달의민족 등 한국 플랫폼 기업과의 컨소시엄도 구축해 베트남 디지털 금융시장을 빠르게 장악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우리은행 베트남 데이터센터(IDC)'의 모습. 우리은행 베트남법인 제공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우리은행 베트남 데이터센터(IDC)'의 모습. 우리은행 베트남법인 제공

우리은행은 디테일과 노하우로 승부를 걸었다. 지난 2017년 기업전용 디지털 서비스인 '펌 뱅킹'을 베트남에 처음 보급했던 우리은행은 가입 기업들의 실시간 이체·결제 서비스를 확대 제공할 계획이다. 베트남에서 펌 뱅킹 실시간 이체 시스템을 갖춘 금융사는 우리은행이 유일하다. 우리은행을 따라 펌 뱅킹 서비스를 시작한 베트남 은행들은 아직 기업들의 서비스 요청 건을 묶어 지연 처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우리은행 베트남법인 관계자는 "베트남 금융권이 추진 중인 '차세대 금융결제 공동망(ACH)'에 외국계 은행 중 최초로 우리은행이 가입됐다"며 "ACH를 통해 차별화된 디지털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시에 MZ세대를 겨냥한 디지털 적금상품 등도 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27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를 방문한 윤종원 IBK기업은행장이 베트남 진출 한국 중소기업에 대한 디지털 지원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지난달 27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를 방문한 윤종원 IBK기업은행장이 베트남 진출 한국 중소기업에 대한 디지털 지원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IBK기업은행은 주고객인 베트남 진출 한국 중소기업 지원에 '디지털'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윤종원 기업은행장은 지난달 27일 하노이에서 진행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업은행은 중소기업에 특화된 모바일뱅킹 등으로 현지 중소기업에 디지털 편의를 제공할 예정"이라며 "코로나19 사태로 지체된 현지법인 설립 작업도 잘 마무리해 한국 기업인들이 베트남에서도 폭넓은 금융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국 은행들의 디지털 시장 진출을 허용한 베트남은 한국 금융계의 앞으로의 역할에도 기대하고 있다. 베트남 중앙은행 핵심 관계자는 "1999년 은행 현대화 작업을 시작할 당시 한국 시스템을 '롤모델'로 도입한 게 베트남"이라며 "앞으로도 한국의 '인터넷전문은행특별법' 등을 뼈대 삼아 부족한 법제를 만드는 등 양국 금융산업이 공동 성장할 수 있도록 협력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