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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쭐내고 싶은 어른들

입력
2022.07.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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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은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 등을 각색한 이야기로 다양한 메시지와 질문을 던졌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은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 등을 각색한 이야기로 다양한 메시지와 질문을 던졌다. 넷플릭스 제공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눈앞 교실에서 펼쳐진 무자비한 폭행에 소스라친 것도 잠시. 중3 소년의 뇌리에 이날을 못 박은 건 ‘허리띠’라는 단어였다. 피해 학생은 심한 폭행에 눈물, 콧물 범벅이 돼 있었다. 가해 학생은 모두 앞에서 대걸레 자루, 책상, 의자를 집어던지고도 분이 안 풀린 듯 갑자기 자기 허리띠를 뽑아 수십 차례나 휘둘렀다.

소년은 생각했다. “도대체 저 애는 허리띠로 남을 때릴 수도 있다는 걸 어디서 배웠을까.” 보통 아이라면 목격만으로도 충격에 빠질 법한, 상상하기도 어려운 수단이니 말이다. 소년이 어렴풋이나마 그 답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한참이 흘러 법원에서 숱한 소년사건을 담당하는 판사가 되고 나서다. 심재광 판사가 저서 ‘소년을 위한 재판’(공명 발행)에서 회고한 자신의 기억이다.

‘가해자의 서사’는 금기다. 변명이고, 모욕이고, 가해고, 불온한 예언이다. 맞고, 굶고, 아팠고, 불우했기에 가해에 이르렀다는 불필요한 범죄의 이유를 우리는 끔찍이도 싫어한다. 악행에 핑계를 주고, 피해자를 욕보이니 당연하다. 그러니 용서ㆍ감형해야 한다는 건 상식에 반한다. 이를 악용하는 영악한 가해자도 넘친다. 학대와 어려움, 질병을 극복한 무고한 시민에겐 편견의 굴레까지 씌우니 부당하다. 가해ㆍ피해자에 관한 보도는 한 단어가 조심스럽고 ‘불필요한 서사 금지’라는 지적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정, 교화의 현장으로 가면 ‘옛일’을 불러오는 일은 마땅찮지만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 특히 가해자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하다. ‘그딴 핑계는 내밀지 말고 네 죄나 직시하라’고 혼쭐내는 일로는 범죄의 원인이나 재범을 방지할 실마리를 찾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구체 사안을 보면 어릴수록 아이는 자신이 놓인 환경에 어떤 선택권도 없었던 경우가 적잖다. 생각하는 힘이 아직 한참 모자라 죄를 반성하는 일도 거듭된 교육을 거친 뒤에나 가능할까 말까다.

반성하지 않는다고 영원히 가둘 방법도 없지만, ‘닥치고 단죄’의 묘수도 없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 가두고 싶은 가해자 서사의 봉인은 결국 어디에선가 풀리고 만다. 평생을 바쳐 피해자를 위해 상담하고 분투하는 이들, 그래서 더더욱 가해자 서사의 위험성을 모를 리 없는 활동가, 전문가, 공무원들의 입에선 어쩔 수 없이 “가해자, 결국 다른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한 아이”에 대한 우려가 함께 나온다.

촉법소년 연령 하향 논쟁과 이에 환호하는 여론을 보면서 그간 만난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령 하향은 법무부의 각오대로 ‘정교한 준비’를 거친다면 얼마든 의미 있는 논의가 될 수도 있다. 엄마이자 시민으로서 나 역시 간절히 바라건대 아이들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 남을 해하면 안 되고, 그러면 벌을 받는다는 지당한 교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동시에 아이들과 배우고 싶은 건 이런 거다. 우리 사회의 약속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때로 전혀 속이 시원하지도 않고 너무 복잡하다는 것. 그래서 문제를 풀 해답은 때로 속 시원해보이는 단 하나의 열쇠에만 있지 않다는 것 말이다.

만 14세까지 대신 만 13세도 소년법정 대신 형사법정에 세우면 정말 우리가 원하는 엄벌이 이뤄질까. 성가신 보호처분 대신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받아 들면 소년범은 과연 더 깊이 반성할까. 다른 치명적 구멍은 없을까. 촉법소년에 대한 분노처럼, 죄인들에게 왜 세금을 쓰냐는 비난 여론이 더 타오르면 그때는 대선 공약으로 교정 예산도 줄여야 하는 걸까.

아이들의 영악한 범행만큼이나 ‘혼쭐 본능’에 심취한 우리들의 세계가 나는 자주 두렵다. 어디서 배웠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범행을 벌써 터득하고 만 아이. 이 애를 오직 경멸만 하는 우리는, 어른이라 불려도 좋은 걸까. 우리는 다 자란 것일까. 어려서 꿈꿨던 건 좀 다른 어른이었던 것 같다.

김혜영 커넥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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