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그대로'라는 말, '하나도 안 변했다'는 그 말

입력
2022.07.01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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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만이라 했다. 소고기와 망고와 수박을 사 들고 오래전에 떠난 동네를 찾아온 건 '더 늦기 전에 어머니를 찾아봬야지' 결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이는 엄마를 끌어안은 채 연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머니,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그 옛날 의지할 데 없던 저를 태산처럼 품어주시던 모습 그대로예요." 엄마는 어느새 예순 살이 넘어버린 그이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이렇게 일 삼아 찾아오다니, 자네도 예전 마음 그대로야."

망고와 수박을 썰어 내온 나는 가만히 앉아 50년 가까이 된 어느 봄날을 떠올렸다. 그이가 우리 동네로 시집오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마흔한 살 기태 아저씨의 신부가 된 아랫집 새색시는 열여덟 살이라고 했다. 열여덟, 그게 어떤 나이인지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그 봄, 산딸기와 오디를 바구니가 넘치도록 따서 우물가로 가져가면 아랫집 새색시가 내 바구니를 낚아채 막 퍼 올린 물로 씻어주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그이가 시집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랫집에서 툭하면 안주인 할머니의 악다구니가 들려오고, 그 뒤엔 어김없이 고주망태가 된 기태 아저씨의 고함과 그릇 깨지는 소리가 담장을 타고 넘었다. 필설로 다 못할 시집살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돌아갈 친정마저 마땅찮던 그에게 대피처는 엄마뿐이었던 것 같다. 겁에 잔뜩 질린 채 우리 집 부엌으로 뛰어들던 그이를 엄마는 두 팔로 그러안아 한참 토닥이고, 따뜻한 밥상 앞에 앉혔다. 언젠가 더는 버텨낼 자신이 없다며 우는 그이를 엄마가 다독이던 장면이 생생하다. "자네 마음 모르지 않아. 한데 은애 엄마, 자네는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야. 한창 커가는 애들 생각해서 조금만 더 견뎌주면 안 될까?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야." 엄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시부모가 돌아가신 뒤 경기도 어느 도시로 나간 그이는 타고난 손맛을 밑천 삼아 식당을 열었고, 번창하는 가게를 얼마 전 둘째에게 물려주었다고 했다.

"낯선 도시로 나가서 외롭고 힘들 때마다 어머니 말을 떠올렸어요. '자네는 강하고 현명하다.' 그 말씀에 의지해 버텨왔는데, 이렇게 마주 보며 어머니 목소리를 다시 들으니…" 넉넉하게 웃던 그이가 왈칵 울자 엄마는 예전처럼 그이를 그러안았다. "선량하고 강인하던 예전 모습 그대로 변치 않고 살아줘서, 내가 더 고맙네."

한때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똑같네, 예전 그대로야"를 늘어놓는 게 주책맞고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언젠가 그 말을 내뱉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깨달았다. 입에 발린 거짓말이 결코 아니라는 걸. M자로 앞머리가 벗겨진 한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저 배불뚝이 아저씨가 나를 보고 웃네? 가만있자. 쌍꺼풀진 저 눈매, 수줍게 오므린 저 친숙한 입꼬리. 30여 년간 못 만난 초등학교 때 친구라는 걸 알아본 순간, 나는 눈물까지 훔쳐가며 말했다. "세상에, 그대로구나. 너는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시간의 힘은 무자비해서 열여덟 새색시는 삶의 온갖 신산을 겪어낸 60대 여인으로 변하고, 그때 40대 후반이던 내 엄마는 구순을 목전에 둔 백발노인이 되었다. 그 완강한 시간 앞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을 한눈에 찾아내고 눈물 흘리는 것, 삶의 진짜 이야기들은 사실 그 안에 숨겨져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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