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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국기 문란'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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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회사가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기업, 공공기관의 몇몇 인사팀 임원에게 "회장이나 사장(인사권자) 재가가 나기 전 중요 임원 인사를 발표하는 일이 가능하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그들은 한마디 덧붙였다. "도대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겠어요?"
지난 6월 21일 정부가 경찰 고위직인 치안감 인사를 단행했다가 불과 2시간여 만에 번복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상식선에서 추측할 수 있는 원인은 두 가지다. 먼저 단순 실수다. 경찰 고위직 인사는 '경찰 인사안 마련→행정안전부 제출→행안부·대통령실 협의→최종 인사안 마련→경찰 하달 및 발표'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경찰청 인사과장이나 행정안전부 치안정책관이 대통령 재가가 안 난 중간 단계의 문서를 주고받았을 수 있다. 아니면 모종의 세력이 개입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이미 언론 보도까지 이뤄진 인사를 뒤엎을 정도의 힘 있는 실세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윤석열 대통령은 출근길 인터뷰에서 이 사태를 '인사 쿠데타'로 규정해 버렸다. 경찰이 대통령실·행안부를 사실상 '패싱'하고 자체 인사안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중대한 국기 문란이 아니면 공무원으로서 할 수 없는 어이없는 과오"라며 '격노'했다. 14만 경찰 조직을 대표하는 경찰청에서 '동네 구멍가게에서나 볼 법한' 일이 벌어졌단 얘기다.
윤 대통령이 말한 가능성을 아예 닫아둘 순 없지만 쉽게 납득은 안 간다. 인사 과정에서 경찰 독단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어 보여서다. 대통령 결재 전 경찰이 인사안을 공개한 게 문제라는 대통령실 지적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전부터 '선(先)내정 후(後)결재' 수순을 밟아 온 사례가 여럿 확인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찰이 이제 막 출범한 새 정권을 상대로 '인사 쿠데타'를 벌일 이렇다 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 쿠데타가 맞다면 경찰청 수뇌부들을 상대로 감찰이나 수사 등 엄중한 책임을 묻는 절차가 벌써 시작됐을 텐데 그런 움직임도 없다. 경찰 안팎에선 인사담당자 징계로 사태가 마무리될 거란 소문이 돈다.
대통령 발언은 경찰 기강을 잡기 위한 차원이란 해석이 그래서 나온다. 경찰국 신설로 야기된 새 정부의 '경찰 장악' 프레임을 '인사 쿠데타'로 전환하겠단 의중도 엿보인다. 이 분석이 맞다면 대통령실 의도는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경찰청장은 임기를 한 달 앞두고 물러났고 이후 경찰은 '납작' 엎드려 있다.
우리는 8년 전에도 대통령이 '국기 문란'을 언급하며 '격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2014년 한 일간지에서 비선 실세의 국정개입 의혹을 보도하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문건을 외부로 유출한 것이 어떤 의도인지 모르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 문란 행위"라고 '격노'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른바 '정윤회 문건'의 진위 여부와 내용은 외면한 채 '유출 경위'만 다그쳤다. 당시 초기 상황은 박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렀다. 문건 유출에만 초점이 맞춰져 검찰 수사가 진행됐고 문건은 한낱 '지라시'로 치부됐다.
그러나 그 이후 역사의 물줄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진실은 주머니에 넣은 송곳과 같다. 아무리 잘 집어넣어도 곧 다른 쪽을 뚫고 나온다. 인사 번복 미스터리의 진실도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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