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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한미일 정상회담은 번번이 용두사미...이번에는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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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이에서 멋쩍게 웃었다. 핵안보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최초의 한미일 정상회담이었다. 아베 총리는 서툰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지만 박 대통령은 눈도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반응이 싸늘했다. 미국의 성화에 못 이겨 한일 정상이 모인 티가 역력했다.
이처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미일 정상이 굳이 만난 이유가 있었다. 2012년 6월 한일 정보보호협정(GSOMIA)이 밀실 추진 논란으로 틀어지면서 이를 주도한 미국은 체면을 구겼다. 반면 북한은 2013년 2월 3차 핵실험에 이어 2014년 들어 노동미사일을 쏘아대며 위협수위를 높였다. 지금이야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일상화됐지만 당시는 5년 만의 도발이라 대북 경계심이 최고조에 달했다.
마지못해 마주 앉은 자리였던 만큼 성과는 구색맞추기에 가까웠다. 반감이 심했던 한일 GSOMIA 대신 2014년 12월 한미일 정보공유약정(TISA)을 맺는 것으로 정리됐다. 국회 동의가 필요 없는 꼼수였다. 하지만 더 이상의 모멘텀이 없었다. 과거사 갈등이 여전한 상황에서 2015년 6월 한일 수교 50주년 자리에 양국 정상의 상대국 방문은 끝내 무산됐다. 오히려 같은 해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라는 무리수를 뒀다가 뒤늦게 체결과정이 알려지면서 양국 관계에 역풍이 거셌다.
2017년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 직후 열린 유엔 총회를 계기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아베 총리가 만났다. 한미일 관계가 돈독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컸지만 실상은 달랐다. 미일 정상은 강력한 대북 메시지를 보낸 반면, 문 대통령은 “분쟁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다뤄야 한다”고 엇박자를 냈다. 한미일 협력이 얼마나 취약한지 균열만 드러낸 셈이다.
2021년 6월 영국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맞춰 한미일 정상회담이 재차 추진됐다. 이번에도 북한을 압박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이 주도했다. 하지만 끝내 무산됐다. 당시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불신이 너무 커서 정상들이 마주 앉기에는 적절치 않은 시점”이라고 전했다. 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총리와의 정상회담도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다. 윤석열 대통령은 29일 스페인 마드리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를 계기로 마련된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한미일이 세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고 한껏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한미동맹은 역내 평화와 번영의 핵심축”이라고 강조한 것과 비교하면 일본까지 끌어들여 협력의 대상이나 범위를 늘린 것이다.
다만 한일 간 파열음이 잦아들지 않는다면 한미일 협력은 또다시 ‘용두사미’로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오랜 앙금인 독도 영유권과 일본 교과서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국내 진출 일본 전범기업 자산 현금화 △조건부 종료 유예 상태인 GSOMIA 복원 △일본의 수출 규제 등 한일관계 진전을 막는 걸림돌은 부지기수다.
관건은 한미일 정상회담의 성과를 빛낼 후속조치에 달렸다. 당장 한일 정상이 셔틀외교를 복원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이 7월 일본을 찾는 시나리오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다만 또 다른 채널인 군사협력의 경우, 한국 국방부 장관의 방일은 2009년 4월 이상희 장관을 끝으로 13년째 감감무소식이다. 2011년 7월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보다도 더 오래됐다. 이런 상태로 한일관계가 삐걱댄다면 한미일 정상회담은 한낱 이벤트에 그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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