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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 눈앞서 딸을"… 전시 강간은 우크라 여성을 짓밟았다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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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많이 떠났다. 강간이 두려우니까."
우크라이나 북서쪽 도시들, 즉 러시아가 키이우를 향해 진격하며 가장 먼저 짓밟은 도시를 찾았을 때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한국일보는 현지 취재를 통해 러시아군이 저지른 무자비한 전시 성폭력 실태 중 '극히 일부'를 확인했다. 또한 '전쟁의 역사'가 왜 '강간의 역사'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는가에 대한 답을 현지 전문가에게 구했다.
한국일보는 끔찍한 성폭력 사례를 입수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전시 강간 조사' 실태를 파악하고 있는 인사가 알려 준 내용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했다(피해자 보호를 위해 지명 등 구체적 정보를 생략했다).
"우크라이나 북쪽의 한 지역. 러시아군이 모녀의 단독주택에 들이닥쳤다.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이 아니어서 근처에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움직이지 마!' 러시아군은 모녀를 협박했다. 리더로 추정되는 인물은 가능한 한 많은 부하들을 집에 들였다. '최대한 많은 인원'에게 강간을 허용한 것이다.
그들은 10대 딸부터 유린했다. '차례'를 기다리며 줄까지 섰다. 엄마도 집단 강간을 당했다. 엄마는 '딸 대신 내가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피투성이가 된 딸이 보였다.
딸은 그날 이후 입을 열지 않는다. 엄마는 딸을 지키고자 전시 성폭력 피해자 지원센터를 통해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국제기구, 각국 언론이 파악한 전시 강간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레시아 바실렌코 우크라이나 의원은 지난 4월 사진 한 장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나치' 문양인 '하켄 크로이츠'(卍 역만자)가 등에 새겨진 채 죽은 여성의 사진이었다. 그는 살해되기 전 성폭행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우크라이나 영아를 성폭행하는 영상을 재미로 SNS에 올렸다 체포된 러시아 병사도 있었다.
프라밀라 패튼 '유엔 사무총장 분쟁하 성폭력 특별대표'는 지난달 6일 전시 성폭력 사례를 보고받은 뒤 "집단 강간부터 '파트너'(부인∙애인 등)가 당하는 것을 지켜보도록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폭력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진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을 주저한다. 유엔인권사무소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공개한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우크라이나 내에서 벌어진 분쟁 관련 성폭력을 조사하고 있지만 생존자들이 인터뷰를 거부하는 사례가 많아 정확한 추적이 어렵다." 유엔인권사무소는 올해 2월 러시아 침공 이후 현재까지 23건의 성폭행 사례를 파악했을 뿐이다.
여성인 인나 소우선 우크라이나 의원을 지난달 29일(현지시간) 현지에서 줌(Zoom)으로 인터뷰했다. 정치·교육을 전공한 그는 29세 때였던 2014년 최연소 교육과학부 차관에 발탁된 이후 정계에서 일하며 성평등과 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쏟아왔다.
소우선 의원에게 '전시 성폭력 사례 집계 현황'을 묻자 "가장 어려운 질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정보를 입수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다. 수사 당국과 시민단체. 그런데 양쪽이 집계한 수치가 다르다. 전시 강간이 그만큼 꽁꽁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소우선 의원은 "성폭력 피해자 개개인의 사례를 모아 모자이크처럼 조합해 러시아군의 범죄 패턴을 파악하고 있다"며 "피해자가 사망한 사례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왜 피해자들은 입을 떼지 않을까. 유럽 각국에 사무소를 두고 활동 중인 성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 '라 스트라다' 소속 다리야 플료 변호사에게 질문했다. 라 스트라다는 우크라이나 수사 당국과 긴밀히 협업하고 있다.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습을 걱정해 지하철역에서 인터뷰할 것을 요구한 플료 변호사는 이렇게 답했다. "강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키려고 하는 신체적, 감정적 경계를 가장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침해하는 범죄다. 또한 '피해자인 여성이 도발해서 범죄를 당한 것 아닌가'와 같은 편견이 전쟁 중에도 작동한다. 피해자들이 입을 여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전쟁은 가장 끔찍한 성폭력을 동반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그 참혹한 진실을 체감 중인 소우선 의원과 플료 변호사도 그 이유를 고민하고 있었다.
① 처벌받지 않을 것이란 안도감
전시 강간은 주로 점령 지역에서 발생한다. 피점령국의 치안·사법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것을 침략국 군인들은 간파하고 있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러시아군 역시 처벌 받을 걱정을 하지 않는다.
플료 변호사는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피해자들을 돕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처벌받지 않을 것이란 확신에 차서 '하고 싶은 것'을 함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② 폭력적·야만적 힘의 과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물리적 힘이다. 이성과 인간성은 미덕이 아니다. 성폭력은 전쟁·분쟁 지역에서 집단과 개인이 무자비한 힘을 자랑하고 패자를 무력화시키는 수단이다.
플료 변호사는 "러시아군은 손쉽게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대상, 즉 여성과 아동을 골라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폭력의 근원은 통제와 지배의 욕망"이라며 "강간은 '누군가를 지배하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전쟁과 닮았다"고 말했다.
소우선 의원은 "강간은 그 자체로 '우리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침략국의 시그널"이라며 "가장 약한 존재를 유린함으로써 국가 전체를 흔드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전시 강간이 우크라이나 남성들을 굴복시키는 데도 활용된다는 것이다.
소우선 의원은 "전장에 나가는 남성은 차라리 죽임을 당할지언정, 강간처럼 정신을 말살하는 류의 범죄를 당하진 않는다"고도 했다.
우크라이나는 문자 그대로 전쟁 중이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동부 지역은 통째로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수도 키이우로 언제 미사일이 날아들지 알 수 없다. "국가가 흔들리는데 성폭력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삐딱한 시선에 대해 소우선 의원은 이렇게 반박했다.
"전쟁을 벌이고 전쟁 피해를 당하는 우리 모두는 '인간'이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빠짐없이 중요하다. 전시 강간을 '운 없는 개인이 겪은 안타까운 작은 일' 정도로 치부해선 안 된다. 분명히 직시해야 할 건, 러시아가 훼손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이다.
전쟁은 추상적인 그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과 세계를 바꾸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개개인이 겪는 전쟁 피해를 규명하는 작업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정치외교적 담론으로 전쟁을 중계해선 안 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알려야 한다.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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