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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길에 보이는 세상,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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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요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야금야금 아껴가며 보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나의 첫 심부름’이라는 일본 예능이다. 만 5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난생처음 혼자 힘으로 심부름을 해내는 과정을 10분 내외로 보여주는데,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어찌나 드라마틱한지 하나만 보고 그만두기가 참 힘들다.
간단한 심부름이지만 어른들이 미처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아이들 앞에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를 이정표 삼으라고 했는데 하필 심부름 나간 날은 이발소가 쉬는 날이어서 못 찾고 헤매기도 하고, 커다란 양배추를 맨손으로 뽑으려다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고, 미끄덩한 생선이 길바닥에 쏟아져서 난감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오로지 심부름 생각밖에 없는 아이들은 어떻게든 해낸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아이들은 ‘어른’ 대접을 해줄 때 정말 기뻐한다. 어른들이 자신을 믿고 중요한 일을 맡겼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일단 어깨를 으쓱하며 나선다. 그리고 자신이 맞닥뜨린 어려움 앞에서 그 짧은 삶의 경험을 총동원해 폭발적인 창의력을 발휘한다. 조그만 몸으로 임무를 완수한 아이들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이 된다.
성공이란 실수나 실패가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아이들이 실수할 수 있는 사소한 기회조차 자꾸 차단하는 사회적 환경이 걱정스러운 건 그렇게 해서는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기가 힘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이지 작가의 첫 그림책 '혼자 갈 수 있어'의 주인공 아이는 학원 앞으로 늘 마중 나오던 할아버지가 조금 늦으시자 ‘오늘은 혼자 가볼까?’ 생각하고는 슬금슬금 킥보드를 앞으로 밀며 나아간다. 혼자 집에 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아이의 표정은 이미 자신감으로 가득해 보인다.
사실 아이는 그전부터 혼자 가고 싶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항상 아직은 때가 아니다"고 하는 어른들의 걱정 앞에서 “나를 못 믿는 걸까?” 불만을 가졌던 듯하다. 바람에 날린 모자를 따라가느라 조금 늦었던 할아버지가 아이 앞에 떡하니 나타났지만, 주인공은 오늘만큼은 결심을 굽히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귀갓길은 뜻밖에 헷갈리기도 하고, 수풀에 숨어 있던 길고양이가 킥보드에 뛰어 들어오질 않나, 이윽고 비둘기를 쫓아 튀어 나가질 않나,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다. 그래도 아이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이 도시의 또 다른 거주자인 길고양이와 비둘기까지도 챙기면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주위는 어두워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의 자신감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그림이 주는 속도감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아이가 타고 있던 킥보드는 어느새 블랙 팬서처럼 빠르게 어둑어둑해진 대도시의 하늘로 날아오른다. 꿈꾸던 일을 혼자 힘으로 해냈을 때의 쾌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케 하는 과감한 연출이 몇 장면에 걸쳐 이어지다가... 아이쿠! 컴컴한 길에서 결국 아이는 넘어지고 만다. 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아이는 툭툭 털고 일어난다.
차를 타면 금세 왔을 길을 가로등에 불이 켜질 때쯤에야 도착했지만, 아이는 기쁨과 흥분으로 쉽게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계속 뒤에서 지켜보며 걸어왔던 할아버지는 환한 달빛 아래 킥보드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아이를 또 오랫동안 기다려준다. 함께 왔던 고양이도, 비둘기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그 순간을 즐기는 것 같아 보인다.
아이들이 양육자의 손을 놓고 혼자 가보겠다고 하는 순간, 어른들은 대견스러운 마음과 함께 왠지 모를 서운함과 불안함까지 수많은 감정에 휩싸인다. 온갖 걱정거리들로 가득한 세상에 아이를 내보내는 일에는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 심부름하기, 친구들과 대중교통으로 목적지 찾아가기 같은 일들을 걱정 때문에 계속 유예시킬 수만은 없지 않을까.
양육자들이 이 그림책을 본다면, 주인공 아이의 뿌듯한 얼굴과 날아갈 듯한 포즈를 보면서 ‘아이를 믿어주는 일’이란 평생 다시 없을 멋진 경험을 선사하는 일임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다큐 ‘나의 첫 심부름’과 그림책 '혼자 갈 수 있어' 모두 안전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험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이와 양육자 모두가 안심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어른들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혼자 갈 수 있어'의 장면들을 다시 보면, 횡단보도에서 정확히 정지선을 지키는 자동차들, 아이들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주는 어른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또, 놀이터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 시각장애인, 휠체어를 탄 사람, 유아차를 모는 사람, 지팡이를 짚은 노인, 산책하는 개 등 다양한 존재들이 아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혼자서 길을 찾아간다는 것은 이 수많은 존재들을 스스로 발견하고 자신의 세계에 진입시키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신수진 어린이책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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