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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애호가라면, 일년 내내 순례객 끊이지 않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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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아버지를 닮아 애주가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은 와인, 맥주, 위스키다. 그렇다. 애주가에게는 세상 모든 술이 제각각의 이유로 소중하다. 싱싱한 굴에 곁들이는 차가운 샤블리, 야구장 외야석에서 마시는 종이컵 맥주처럼 와인은 와인이라서, 맥주는 맥주라서 빛나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위스키는 예외다. 위스키는 언제나 빛난다. 맛 좋은 위스키를 마신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니까. 그러고 보니 지난해 내가 한국일보 지면에 쓴 신춘문예 당선소감에도 위스키라는 단어가 나온다. “남편에게 오늘은 맥주 말고 위스키 한잔 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음, 그래서 그날 마신 술이 뭐였더라......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모든 술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그 술이 빚어지는 고장에서 마실 때,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에는 이런 취지의 말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라거나, ‘산지에서 멀어질수록 그 술을 구성하고 있는 무언가가 조금씩 바래지는 느낌’이라거나 하는 식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흥,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싶었는데 8년 전 스코틀랜드로 증류소 견학을 다녀온 후로는 나 역시 그처럼 팔자 좋은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똑같은 위스키인데 맛이 미묘하게 다르네. 스코틀랜드에서 마실 때는 좀 더 짭조름한 갯내음이 났었는데 말야.”
각설하고, 지난 6월 증류소 취재를 핑계로 또 한 번 스코틀랜드에 다녀왔다(할렐루야!). 목적지는 스코틀랜드의 4대 위스키 산지 중 하나인 스페이사이드(Speyside). 하일랜드(스코틀랜드 최북단에 위치한 산악지대) 동북부에 위치한, 스코틀랜드 증류소의 절반가량인 50여 개 증류소가 우르르 모여 있어 전 세계 위스키 애호가들의 순례가 연중 내내 이어지는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하일랜드에 속하지만, 술에 진심인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위스키에 있어서만큼은 두 지역을 엄밀히 구분한다. 하일랜드 지역 자체가 워낙 방대한 데다, 특히 남쪽에서 생산되는 하일랜드 위스키와 스페이사이드 위스키는 우리로 치면 ‘진라면’과 ‘너구리’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코틀랜드 사람만은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맛이랄까.
두 지역은 오늘날 싱글몰트 위스키의 성지로 꼽히는데, 그렇게 된 이유도 재미있다. 18세기 초 국가가 위스키 생산을 규제하자 제조업자 중 일부는 산(하일랜드)으로, 일부는 강 근처(스페이사이드)로 숨어 술을 빚었는데 이때 부족한 석탄을 대체하기 위해 사용한 이탄이 오늘날 싱글몰트 위스키 특유의 훈연 향을 만들어낸 것이다.(역시나 주당들은 어디서든 살길을 찾아내는 법이다.)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크통 숙성 또한 제조업자들이 밀주를 들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발견한 마법이다. 당시 많이 마시던 셰리와인 통에 위스키를 넣어 저장했더니 각종 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황금빛 술이 탄생한 것이다.
스페이사이드는 스페이 강에서 공급되는 풍부한 물과 비옥한 토양, 맥아 건조에 필요한 이탄(peat)과 차갑고 습한 공기까지 위스키 제조에 최적화된 환경을 갖추고 있다. 맥켈란, 글렌피딕, 발베니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싱글몰트 위스키 원액은 물론이고 발렌타인, 로얄살루트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블렌디드 스카치위스키의 핵심이 되는 키 몰트 역시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다. 이번에 내가 찾은 곳은 로얄살루트의 키 몰트가 생산되는 스트라스아일라 증류소(Strathisla Distillery). 1786년에 세워진, 현재 가동 중인 스카치위스키 증류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증류소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양떼들이 뛰노는 목초지와 농가들이 느리게 흘러갔다. 비현실적으로 파란 하늘과 푸릇푸릇한 구릉의 대비가 마치 윈도우XP 초기 바탕화면을 연상케 했다. 단조로운 풍경 사이로 삽살개처럼 앞머리를 부스스 내린 소가 눈에 띄었다. 하일랜드에만 산다는 털복숭이 소다. 하일랜드의 채찍 같은 바람에 맞서는 과정에서 그처럼 털이 길게 자라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아닌 게 아니라 스페이사이드의 자연은 무척 터프하다. 빙하가 구르면서 깎인 험준한 협곡과 산맥, 계곡과 호수가 드넓은 대지 위로 돌림노래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전반적으로 애교가 없다고 할까. 아무튼 인간에게 잘 보이려는 태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애버딘 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스트라스아일라 증류소는 녹음이 우거진 숲속에서 고요히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오래된 성체처럼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사뭇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로비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투어를 신청한 방문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모두 오직 위스키 하나를 위해 이 외진 땅까지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곧 브랜드 홍보 대사인 앰배서더와 함께 위스키를 만드는 전 과정을 견학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자신을 스코틀랜드 태생이라 소개한 그는 위스키의 원료가 되는 곡물을 분쇄하는 기계장치 앞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 증류소는 하나의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수십 종의 몰트들이 섞이고 조화를 이루며 특별한 구조를 만들어가는 곳이지요.” 전차처럼 덜컹덜컹 돌아가는 공장을 예상했지만 증류소 내부는 의외로 조용했다. 보리를 갈고 물과 섞어 끓이고 정제하는 모든 과정이 잘 정비된 자동화 시스템 아래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뒤이어 몸통이 넓고 목이 긴 호롱불 모양의 증류기들이 우리를 맞았다. 뜨거운 공기 속에 시큼한 발효 냄새가 뭉근하게 감돌았다. 증류기의 긴 목은 불순물과 잡맛을 제거하고, 넓은 몸통은 효모 간의 상호 작용을 촉진시켜 스페이사이드 위스키 특유의 풍부한 과일 향을 추출해낸다고 앰배서더는 설명했다.
거대한 증류기들이 내뿜는 달콤한 열기를 뚫고 밖으로 나온 우리는 위스키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저장창고로 이동했다. 서늘하고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는 보관을 시작한 연도가 적힌 오크통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앰배서더는 21년 전에 만들어진 38년산 위스키를 길어 모두에게 한 잔씩 따라주었다. 증류소를 찾은 소수의 방문객에게만 제공되는 특별한 술이었다. 38년 동안 잠들어 있던 원액에 21년의 시간이 더해진 그 몰트에서는 그윽한 삼나무와 부드러운 아몬드 향이 났다. 공장 견학을 마친 우리는 증류소 근처에 있는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작은 성으로 이동했다. ‘린 하우스(Lynn Houes)’라는 이름의, 방문객을 위한 시음장과 게스트하우스 역할을 겸하는 곳이다.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와이너리 호텔에서 잠을 청하듯, 위스키 애호가들은 숙박 시설을 갖춘 증류소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다. 위스키 향취로 가득한 고성에서의 하룻밤이라니 인생에 길이 남을 경험임이 틀림없다.
이처럼 스페이사이드 여행은 실상 위스키로 시작해서 위스키로 끝난다. 더프타운(Dufftown), 아벨라워(Aberlour), 엘긴(Elgin) 등 지역을 대표하는 증류소들이 모여 있는 마을을 퐁당퐁당 옮겨 다니며 이런저런 위스키를 맛보는 것이 여정의 전부다. 위스키 마니아들이 스페이사이드 여행을 인생의 버킷리스트로 꼽는 이유다. 특히 스페이사이드의 증류소들은 저마다 개성이 또렷해 비교하며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사용하는 이스트 종류와 증류기 모양, 원액 숙성 방법이 각각 다르다. 자신의 일에 묵묵히 열중하는 직원들을 보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운이 좋으면 장인들이 일일이 맥아를 삽으로 뒤집어 건조하는 모습이나 손수 나무를 잘라 오크통을 제작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증류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그 지역 주민들로 이뤄져 있는데, 8년 전 발렌타인의 키 몰트를 생산하는 글렌버기 증류소를 견학할 때는 뜻밖에 놀라운 풍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퇴근한 주민들이 들판에 앉아 마치 맥주처럼 위스키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정말이지 스페이사이드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돌아와서, 아쉽게도 나는 일정상 린 하우스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위스키를 채워 놓은 ‘위스키 라이브러리’를 지나 다이닝룸에 들어서자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인 킬트를 입은 직원이 백파이프를 연주하며 방문객들을 맞았다. 창밖에 액자처럼 담긴 스페이사이드의 광활한 자연을 바라보며 위스키가 담긴 튤립 모양 잔을 둥글게 돌렸다. 스페이사이드 특유의 야생적인 공기가 그 호박색 액체 안에 그대로 스미는 느낌이었다. 돌아가서 또다시 ‘짭조름한 갯내음’ 운운할 내 모습을 상상하니 실실 웃음이 났다. 사실 위스키에서 나는 짠맛은 일종의 착시에 가깝다는 것이 과학계의 정설이다. 어떤 술이든 산지에서 마셔야 가장 제맛이 난다는 하루키의 말도 실은 그저 소설가다운 상상력의 소산일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 착시를 경험하기 위해 다들 이 고장을 찾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따스한 계피향이 나는 위스키를 천천히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혀끝에서 어릴 적 아버지가 자주 사주시던 스카치 캔디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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