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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브리핑과 도어스테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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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태 때 마련된 ‘형사사건 공보금지 규정’에 따라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검찰에 ‘티타임’으로 불렸던 비공개 정례 브리핑이 열리던 시절이 있었다. 수사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검찰이 속 시원히 언론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일은 드물었다. 그 무렵 티타임은 사이다 없이 삶은 고구마 100개는 삼킨 것마냥 가슴이 꽉 막히는 시간이었다. 브리핑 내내 머리를 굴려보지만 뭐 하나 손에 잡히는 건 없고 목적지 없이 표류하는 난파선 신세 같았다.
검찰도 피의사실 공표를 피해 가며 국민 알권리를 충족시키려면 선문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환이 언제냐 물으면 “이제 씨 뿌렸는데 밥 내놓으라 한다”고 되묻는 식이었다. 행간을 읽어 달라느니, 수사가 7부 능선을 넘었느니 하는 말들도 기사에 담기에 참 민망한 문구였다. 그나마 팩트를 챙기려면 취재원 집 앞에서 기다리는 수고를 해야 했지만 그것도 매번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선문답 브리핑’에 적응해야 했던 취재 기자 입장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시도하고 있는 도어스테핑(출근길 약식 회견)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늦은 밤 일부러 찾아갈 필요도 없고, 질문자, 질문 개수, 순번 등을 미리 정하는 기자간담회의 거추장스러움도 없다. 현관에서 대통령 출근을 기다렸다가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발화자의 소통 의지도 합격점이다. 취임 다음 날 시작한 총 21번의 도어스테핑에서 윤 대통령은 대부분의 질문에 답을 했다. 대통령실 설명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출근 전 언론 보도를 챙겨 보면서 직접 예상 질문과 답을 정리한다고 한다. 참모들과 둘러앉아 토론하고 다듬어 낸 메시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연중 행사 같았던 기자회견 일정만 소화하거나 참모 뒤에 숨었던 역대 대통령과는 확실히 다르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즉흥적 답변은 득보다 실이 컸다. 최근엔 고용노동부 장관이 주 52시간 개편에 대해 브리핑한 사안을 대통령이 하루 만에 정부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말해 혼선을 불렀다. ‘과거엔 민변 출신이 도배’ ‘대통령 집무실도 허가되는 판’ 같은 발언은 코드 인사를 당연시하고 혐오 시위를 묵인한다는 오해를 낳았다. ‘국기문란’처럼 대통령 표현이 너무 단정적이거나 앞서 나가면 참모나 부처가 대통령 말에 갇히게 된다.
새로 시도되는 이 실험에 대해선 ‘신선하다’는 호평부터 ‘스스로 판 자기 무덤’이라는 악담까지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누군가는 ‘권력형 침묵에 종지부를 찍은 역사적 변화’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에 더 공감한다. 대통령 후보만 되어도 잔뜩 힘이 들어가 아예 소통을 외면하거나 스스로 자리의 무게와 엄숙함에 눌려 비공개 소통을 선호하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탈격식의 소통을 통해 대통령 의중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건 분명 진일보한 변화다.
도어스테핑은 길어야 3~5분이면 끝난다. 찰나의 순간이니 실수와 혼선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하지만 부정확한 기억과 정제되지 않은 표현으로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시간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정치인의 언어는 숙의와 토론의 대상이다. 도어스테핑이 의미 있는 공론장으로 기능하려면 철학과 식견의 언어로 채울 필요가 있다. 때론 고구마 같았던 선문답 브리핑에서도 안목과 통찰이 빛나는 순간은 있었다. 양보다는 질이 더 중요하다. 탈격식의 소통과 정제된 언어,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려면 윤 대통령이 지금보다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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