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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잡는 미친 기름값... 싼 집 찾아 떠난 원거리 통근자 직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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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물어요? 완전히 미쳤죠!"
26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의 한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넣고 있던 루이자씨에게 기름값 얘기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짜증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불편한 심기는 유가 때문이다. 이 주유소의 휘발유 판매가격(셀프 주유 기준)은 갤런(약 3.79ℓ)당 6.71달러. 한국식으로 환산하면 ℓ당 2,274원(1달러=1,283원 환산) 정도다. 싼 주유소를 찾을 시간이 없어 마지못해 들렀다는 루이자씨는 "1년 전쯤엔 주유통 절반을 채우는 데 40달러가 안 됐는데, 이제는 62달러나 든다"고 말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는 고유가가 뉴노멀(새로운 일상)로 자리 잡으면서, 미국이 기름값 싸다는 것도 옛말이 됐다.
한산한 이 주유소와 달리, 갤런당 5.85달러(ℓ당 1,982원) 가격표를 건 코스트코 주유소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새너제이에서 그나마 저렴하기로 소문난 코스트코 주유소는 주말이면 주변 도로까지 꽉 막을 정도로 정체를 유발한다. 20분이나 기다린 후에야 트럭에 주유기를 꽂은 한 남성은 "다른 주유소와 갤런당 1달러 가까이 차이가 나니 집에서 멀어도 일부러 올 수밖에 없다"고 푸념했다.
평균 연봉이 17만 달러(작년 기준)에 달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 실리콘밸리도 천정부지로 치솟은 기름값의 충격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역 특성상 고유가의 직격타를 맞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리콘밸리가 속한 캘리포니아주는 요즘 미국에서 가장 기름값이 비싼 지역. 고유가발 가스플레이션(가솔린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은 가뜩이나 높은 실리콘밸리의 물가를 더 높이 밀어올려, 이 지역 중산층과 서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중이다.
26일 미국자동차협회(AAA) 집계를 보면, 캘리포니아주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6.321달러로 4.268달러였던 1년 전보다 48.1% 급등했다. 미국 50개 주 중 갤런당 가격이 6달러를 넘어선 곳은 캘리포니아가 유일하다. 미국 평균(4.900달러)보다 29% 높고, 가격이 가장 낮은 조지아주(4.407달러)에 비해서는 43.3% 더 비싸다.
유가 폭등은 세계적 추세지만, 캘리포니아가 유독 더 비싼 값을 치르는 데는 주 정부 정책도 한몫한다.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휘발유세를 부과하고 있는 데다,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한 규제가 높아 관련 비용이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되기 쉽다.
이유는 또 있다. 뉴욕타임스는 "캘리포니아 자체 공급만으로는 수요의 30%밖에 감당할 수 없어 나머지를 알래스카 등 다른 주에서 들여와야 한다"며 "주 사이를 이어주는 송유관이 없다 보니 수송은 선박과 트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풀이했다. 고유가 때문에 해상·육상 운송비가 급증하고, 이 가격이 또 휘발유 소비자가격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기록적인 유가는 40년 만에 온 최악의 물가 상승을 가장 앞장서 견인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일대 소비자물가지수(CPI)를 보면, 휘발유 가격은 1년 전보다 43.5% 오른 것으로 나타나, 식료품(9.5%)과 주택 가격(1.2%) 상승률을 월등히 앞섰다. 지역 언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지난 2월 CPI를 토대로 "올 한 해 이 지역 주민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9년보다 교통비로만 1인당 1,831달러를 더 써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때보다 물가가 더 오른 4월을 기준으로 추산하면, 유류 가격을 포함한 총지출 증가분은 연간 4,585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차를 몰지 않는 이들도 휘발유 가격 폭등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차량공유서비스업체 우버와 리프트가 이미 유가 상승에 대한 대응책으로 유류 할증료를 부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적 호조로 고용을 늘려오던 실리콘밸리의 정보통신(IT) 기업들도 인플레이션에 따른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자 잇달아 감원 계획을 밝히는 중이다. 한때 미국 중고차 거래 시장의 게임체인저란 평가를 받았던 카바나가 중고차값 급등으로 재고 수급 등에 어려움을 겪으며 전체 임직원의 12%(2,500명)를 해고하기로 했다.
코로나19 기간 호황을 누렸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업계 1위 넷플릭스도 전체 인원의 2%(150명)를 줄이기로 했다. 이밖에 가상화폐 업체 코인베이스(1,100명), 사이버 보안업체 원트러스트(950명) 등이 연이어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고액 연봉을 받는 빅테크 직원들의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 인플레이션은 실물 자산이 없는 이에게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기에 '가난한 자의 세금'으로 불린다. 실리콘밸리가 부자 동네라 하지만, 여기에도 낮은 연봉의 일자리나 일용직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이 훨씬 많다. 실리콘밸리에 근무 중인 한 엔지니어는 "여기는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연봉이 낮을수록 먼 곳에서 출퇴근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원거리 통근을 하는 이들에게 고유가는 가처분 소득을 확 떨어뜨리는 주범인 셈이다.
휴일인 이날 코스트코 주유소에서 만난 안토니오씨의 경우도 그랬다. 건설 현장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라는 그는 "차가 없으면 일을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이런 터무니없는 물가를 감당하려면 일을 더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의 다음 대답은 짙은 한숨이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미국의 에너지 시장은 아직 신재생 에너지보다는 석유 등 화석연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의 2019년 기준 집계를 보면, 미국 내에서 생산·소비되는 에너지의 80%가 여전히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유가 상승과 인플레이션의 상관 관계가 큰 편이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의 2018년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유가와 생산자물가지수(PPI)의 상관계수는 0.71에 이른다. 유가가 10% 오르면 생산자물가가 7.1% 오른다는 얘기다. 유가와 소비자물가지수(CPI)의 상관계수는 0.27에 달한다.
미국 산업구조상 서비스 시장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유가가 생산자물가보다는 소비자물가에 주는 영향력이 제한적이기는 하다. 미국 노동부의 CPI 집계를 보면, 지난해 1월부터 지난달까지 에너지 가격 상승률은 47.5%다. 그나마 서비스 요금 가격 상승률이 7.4%에 그치면서, 전체 CPI 상승률은 11.2%를 기록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서비스 가격이 비교적 안정된 상태임에도 두 자릿수 물가 상승률을 기록한 것은 순전히 기름값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석유 가격은 전체 수요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는 교통수단 연료(가솔린ㆍ디젤ㆍ항공유) 가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밖에도 각종 플라스틱 소재와 석유화학 부산물, 도로포장재(아스팔트), 화장품, 포장재 등 산업 전반에 쓰이는 원재료의 가격이 유가와 직접적으로 연동돼 있다. 이런 공산품뿐 아니라 농축수산물 가격 역시 유가 상승의 영향을 받는데, 1차산업 생산품을 운송하는 비용이 급등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유가는 실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기대인플레이션(경제주체들이 예상하는 물가상승률)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다. 예컨대 유가가 올라 자동차 연료비가 더 많이 들 것으로 예상되면, 구직자들이 더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찾게 되고, 결과적으로 임금이 올라 생산비 증가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유가 상황이 계속되면 세계 경제의 심장인 미국 경제의 성장률까지 위협받는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올해 3월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해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오르면, 물가상승률이 0.2%포인트 오르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1%포인트 감소한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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