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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아이들의 행복부터 삼켰다... 학교엔 러시아군 배설물만 [우크라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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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하게 빗은 머리, 곱게 맨 넥타이... 행사가 끝난 뒤 아이들은 한껏 멋을 부린 채 카메라 앞에 섰다.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들의 상기된 표정에 어린 건 긴장보단 기쁨이었다.
아이들의 사진을 만난 건 2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도시 호스토멜의 학교에서다. 사진 속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분명한 건 아이들이 한동안 학교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의 폭력으로 학교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무구한 아이들의 공간부터 앗아갔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인 평평한 운동장,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내부 공간, 숨기 좋은 지하 시설까지…. 학교는 침략자가 가장 먼저 파괴하고, 가장 먼저 차지하는 곳이다. 러시아군 역시 전쟁 발발 직후 우크라이나의 학교들을 향해 총과 미사일을 겨눴다. 도시 곳곳으로 진격한 뒤엔 무너진 학교 건물들을 빼앗아 병사들의 숙소로 활용했다. 러시아군이 물러간 뒤엔 우크라이나군의 거처가 됐다.
24, 25일 우크라이나 수도 인근 도시 이르핀과 호스토멜. 러시아는 전쟁 초기인 2, 3월 키이우 점령을 위해 진군하며 두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귀를 찢는 경보음은 더 이상 울리지 않지만, 도시는 여전히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25일 '호스토멜 2번 학교'를 찾았을 때 기자를 맞은 건 우크라이나 군인들이었다(우크라이나에선 학교 이름 앞에 번호를 붙인다. 한국과 학제가 달라 초·중·고 통합 학교가 많다). 전쟁 전 학생 500명으로 꽉 찼던 학교는 이제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학교 내부로 들어가는 문은 전부 막혀 있고, 창문에는 모래주머니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외부인 출입 금지'라는 표시였다.
군인들 허가를 받아 둘러본 학교는 처참했다. 러시아군이 쏜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았고, 학교 뒤뜰에서 터진 발사체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러시아군이 점령한 장소임을 상징하는 '브이'(V) 표식도 곳곳에 보였다.
학교는 한동안 러시아군의 숙소로 쓰였다. '러시아 음식'이라고 쓰인 음식 상자, 러시아 군인들이 먹다 남긴 식빵과 감자, 화로 터… 곳곳엔 러시아 군인들의 '삶'이 남아 있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갈수록 풍경은 더 처참했다. 교사 이리나(가명)씨의 안내를 받아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교실은 곳곳이 불에 탄 모습이었고, 끊어진 전선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교실 철문에는 포격으로 인한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교실 문짝들은 뜯어진 채 나뒹굴었다.
이리나씨는 러시아군이 떠난 후 학교에 들어왔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학교 안에는 분명 화장실이 여러 개 있는데, 복도와 교실 곳곳에 대변이 가득했습니다. 전쟁은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요." 교실엔 대변 흔적과 함께 "안녕. 미안. 우린 이럴 수밖에 없었어"라는 내용의 러시아어가 쓰여 있었다.
이리나씨는 교실을 둘러보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우리 학교는 '정보화 학교'였어요. 다른 어떤 학교보다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가 많았죠. 러시아군이 물러가고 난 뒤엔 모든 게 사라졌습니다. 싹 다 훔쳐간 것 같아요."
학용품이 차곡차곡 담긴 가방, 학생용 신발 등은 그대로였다. 아이들이 제 물건을 두고 간 건, 곧 다시 학교에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약이 없다. 어떤 아이들은 끝내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이리나씨는 "그나마 덜 파괴된 곳을 보여주겠다"며 한 교실로 안내했다. 출입문엔 '용무 중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가 러시아어로 쓰여 있었다. 러시아군 중에서도 고위급이 사용했던 공간으로 학교 측은 추정했다. 지금은 청소용품을 보관하는 곳으로 쓰인다. '러시아군이 호스토멜의 파괴 전략을 논의하던 공간'이 '일상을 잃은 교사들이 호스토멜의 재건을 고민하는 공간'으로 바뀐 역설이 그곳에 있었다.
이리나씨는 "학교가 너무 많이 파괴돼 복구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며 씁쓸해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우크라이나 정부가 학교 재건축 예산을 언제 마련할 수 있을지, 전부 기약이 없다. 호스토멜 시민들이 대거 피란을 간 탓에 당장 돌아올 아이도 많지 않다.
이어 '이르핀 3번 학교'로 이동했다. 전쟁 전 재학생은 약 2,000명이었다. 이르핀에서 가장 큰 학교였지만, 지금은 가장 많이 파괴된 학교로 통한다. 이곳에서 가라테를 가르치는 교사는 "러시아군이 학교를 겨냥해 발사체를 30개쯤 쏜 것 같다. 너무 많이 훼손돼 복구가 불가능한 건물도 있다"고 말했다.
학교는 지난해 리모델링을 마쳤다. 깔끔해진 학교를 보며 기뻐했던 아이들의 표정을 익명을 요구한 이 가라테 교사는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리모델링 기념으로 올해 3월에는 작은 운동회를 하려고 했어요. 아이들은 잔뜩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군이 쳐들어온 겁니다." 운동회는 당연히 열리지 못했다.
학교 앞뜰에선 아이들 10명이 모여 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군의 자녀들이었다. 이르핀 점령 당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 가족부터 죽이려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피신해 있다 얼마 전에 돌아왔다.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아이들은 그래도 학교에 나온다. 달리 갈 곳이 없어서다. 가라테 교사는 귀띔했다. "아이들에게 전쟁에 대해 물어보면 입을 꾹 닫아요. 그렇지만 아이들에겐 전쟁이 묻어 있어요."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서머 캠프'도 잃었다. 우크라이나 학교의 방학은 6월부터 8월까지다. 방학이 길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이 서머 캠프에서 긴 여름을 보내는 게 보통이다. 전쟁이 휩쓸고 간 도시에선 서머 캠프도 사치가 됐다.
매년 서머 캠프가 열렸던 부차의 한 지역을 24일 찾았다. 아이들 대신 우크라이나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군사시설이라 들어올 수 없다"며 기자의 출입을 막았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키즈 클럽'도 제기능을 못한 지 오래다. 키이우 인근 모슌에 있는 키즈클럽을 찾았다. 그곳 역시 전쟁 구호 물품 저장소로 쓰이고 있었다. 최근까진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숙소로도 사용됐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은 이렇게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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