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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좌를 위협하는 '먹고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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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후보를 승리로 이끈 이 짧은 문장은, 표심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피부에 와 닿는 경제 상황이라는 점을 함축적으로 보여줬다. 30년이 지났건만 낡은 격언은 여전히 세계 정치판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비수를 꽂을 대상이 4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부시’에서 또 다른 지도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 국제사회에서 ‘민심=경제’라는 공식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인물은 누굴까. 다 같이 생각해보시라. 여러 지도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이기를 바란다.
19일 프랑스 총선 결선투표에서 마크롱이 이끄는 중도 연합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선거 판도를 가른 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불러온 고통스러운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이다. 연일 에너지와 식량 가격이 치솟고 있는데 마크롱은 ‘전쟁 중재자’를 자처하며 외교에 ‘올인’했다. 집안 살림(국가 경제)을 외면한 가장을 가족(국민)들이 불신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빈틈은 이념의 양극단에 있는 극좌와 극우 세력이 파고들었다. 이들은 정치 색채는 덜어내고 대신 민생 정책을 앞세워 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결과는 대성공. 좌파연합과 극우 정당은 5년 전 총선 대비 각각 8배, 10배 많은 의석을 얻었다.
반면 마크롱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대가로 ‘20년 만의 의회 과반 확보 실패 대통령’이라는 굴욕을 맛보게 됐다. 5년 임기 내내 여소야대 정국이라는 정치적 마비에 빠지게 된 점을 감안하면, 오판이 처참한 결과를 불러온 셈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정권의 명운을 흔들면서 권좌까지 위협했다는 얘기다.
미국에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마크롱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듯, 물가 잡기에 사활을 걸었다.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물가에 미국 유권자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 상태다. 지난주 그의 지지율(42%)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44%)보다 낮았다. 치솟는 생계 비용이 정권 위기로 비화했다.
민심 이반에 놀란 바이든 행정부는 정권이 표방해온 가치까지 내던졌다. 다음 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를 만나 원유 증산을 요청하기로 한 것. 그를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배후로 지목하고 “국제사회 왕따로 만들겠다”며 비난했던 바이든이, 물가 잡기가 다급해지자 고개를 숙이고 먼저 손을 내민 형국이다. 정치적 의도로 환경과 인권 문제를 저버렸다는 비판이 비등하지만,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에게 높은 기름값보다 더 정치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은 없다. 먹고사는 문제의 엄중함이 다른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꼴이다.
프랑스와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당장 우리나라도 고물가·고금리·고환율 3고(高)에 민생 경제가 악화일로다. 밥상 물가에는 수개월째 빨간불이 들어왔고, 급증하는 이자 부담에 가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2008년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라는 경고가 쏟아지는데 정작 나라 안에선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민생을 보듬어야 할 국회는 원 구성 협상 공전을 거듭하면서 4주째 개점휴업 중이다. 집권당 지도부의 불협화음과 북한 문제를 둘러싼 신구 정권의 신경전은 볼썽사납다.
이제라도 어떻게 헤쳐갈지, 산적한 민생 과제는 어떻게 처리할지 머리를 맞대길 바란다. ‘먹고사니즘(먹고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태도)’을 외면한 정치의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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