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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째 방치된 잿빛 아파트... 못다 핀 1230세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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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지나치다 눈에 띈 어떤 장면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연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이 광경, '이한호의 시사잡경'이 생각할 거리를 담은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도란도란 식구들의 이야기 소리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거실에는 쌓아 올리다 만 벽돌이 나뒹굴고 있다. 그 위로 무려 24년간 쌓인 먼지가 시간을 짓누른다. 산뜻한 페인트 옷은커녕 잿빛 콘크리트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무인(無人) 아파트. 스산한 분위기가 주변 초록색 들판과 사뭇 대조적인 이곳은 충남 보령시 소라아파트다. 1,230가구의 가정을 품을 보금자리를 목표로 지어졌지만 지금 이곳에 사는 이는 아무도 없다.
1993년 건축허가를 받고 이듬해 첫 삽을 뜬 소라아파트는 IMF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1월 시공사 유성건설산업이 파산하며 첫 위기를 맞았다. 이후 사업권을 넘겨받은 경향건설과 시행사 한국부동산신탁주식회사까지 연달아 부도가 나면서 총 15층 중 13층까지만 지어진 채로 여태 방치돼 왔다.
이후 몇 차례의 매매, 신탁, 소송을 거쳐 2009년 진흥상호저축은행 수중에 들어갔으나, 그마저 3년 뒤 파산하면서 현재는 예금보험공사가 아파트를 관리하고 있다. 20년이 넘는 세월,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지만 사실상 ‘떠돌이’ 신세였던 셈이다.
아파트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실상 다 지어진 채로 버려진 현실이 더 와닿는다. 단지 내부에 도로 터가 아직 남아 있고, 벽면에는 각 방에 들어갈 전선이 삐져나와 있다. 일부 층은 조적벽과 새시까지 마감돼 있다. 2020년 보령시의회 회의록은 이미 지어진 13층까지만 잘라서 준공할 수도 있는 상태라고 언급했다.
소라아파트 공사 재개는 이 지역 숙원사업이다. 연초만 해도 ‘최근 공사를 재개했다’는 보도가 나오며 주민들의 기대감을 높였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부동산을 관리하고 있는 예금보험공사와 수의계약을 맺은 업체가 잔금을 지불하지 않아 계약이 파기된 것이다. 새 계약자를 찾아야 하지만 한 업체가 예보공사를 상대로 관련 소송을 제기하며 공매 절차 역시 기약 없이 연기됐다.
이처럼 한번 추진력을 잃은 건축 사업을 되살리기는 쉽지 않다. 국토교통부가 2020년 공개한 공사중단 건축물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단된 건축 사업의 87%가 금전적 문제(자금·사업성 부족 및 관련 업체 부도)가 원인이었다. 한번 사업성이 부정된 사업을 다른 업체에 넘기기 어렵고, 부도까지 이어진 경우 토지·건축물에 대한 권리가 복잡하게 흩어져 이를 다시 모으는 것부터 요원하다.
심지어 권리 관계상의 문제가 전부 해소돼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버린 시장 상황이 변수가 된다. 충남 예산군에서 공사가 중단된 한 아파트는 소유권과 사업권 전부를 확보한 업체가 지난해 모델하우스 부지까지 계약하며 공사재개를 추진했지만 결국 백지화됐다. 최근 신축 아파트 단지 공사현장에서도 핵심 문제로 부상한 원자재 가격 상승이 원인이다. 이 아파트의 경우 기존에 산정한 예산보다 100억 원가량의 비용이 추가로 예상됐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방치(공사가 2년 이상 중단)된 건축 사업 현장 322곳 중 71%에 해당하는 229곳이 10년 이상 중단된 경우다. 한번 버려진 건물의 상당수가 강산이 변할 동안 그 자리에서 기약 없는 미래를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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