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피격'이 '실종'으로 둔갑...눈치 보며 허둥댄 軍의 늑장 대응

입력
2022.06.20 19:30
수정
2022.06.20 19:42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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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총격 알고도 '실종 사건'으로 언론 공지
국방장관 최초 인지 후 36시간 지나 공식 발표
문 대통령 유엔 '종전 선언' 치중, 늑장 보고받아
군 지휘부 갓 교체된 상황, 윗선 '눈치 보기' 지적

서욱 국방부 장관이 2020년 9월 24일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관련해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 참석한 모습. 왼쪽은 사건을 브리핑하는 안영호 당시 합참 작전본부장. 배우한 기자

서욱 국방부 장관이 2020년 9월 24일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관련해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 참석한 모습. 왼쪽은 사건을 브리핑하는 안영호 당시 합참 작전본부장. 배우한 기자

2년 전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의 '월북'을 처음 제기한 건 국방부였다. 대북 특수정보(SI) 첩보를 근거로 들었다.

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SI 첩보 검증 여부와 별개로 국방부는 오락가락 입장을 바꿔 사건 초기 혼선을 자초한 책임이 적지 않다. 이씨가 북한군에 피격당한 것을 알고도 '실종사건'으로 공지하는가 하면, 북한의 대남통지문에 맞춰 '시신 소각'이라는 표현을 '시신 훼손 추정'으로 바꾸는 등 일관성 없이 정해진 방향으로 몰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사건 발생 사흘 전 취임한 서욱 국방부 장관이 상황을 최초 인지한 시점부터 국방부가 '피격 사건'으로 공식 발표하기까지 최소 36시간 넘게 걸린 늑장대응도 지적할 부분이다. 2년이 지나 결론을 뒤집은 군을 향해 불신의 눈초리가 가득한 이유다. 왜 이처럼 총체적 혼란이 발생했을까.

'종전선언' 강조한 文 대통령 유엔연설 의식?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오후 판문점에서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한 뒤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오후 판문점에서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한 뒤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씨가 사라진 건 2020년 9월 21일 오전 11시 30분이었다. 22일 오후 9시 40분 북한군은 이씨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34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30분 뒤 북한군이 무언가를 태우는 듯한 불빛이 군 당국에 포착됐다.

서 장관은 즉시 청와대에 보고했다. 서훈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23일 오전 1시 관계장관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에겐 보고하지 않았다. 한반도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국제사회에 강조한 문 대통령의 유엔총회 화상 기조 연설을 불과 26분 남겨둔 시점이었다. 문 대통령 대면보고는 이날 오전 8시 30분에서야 이뤄졌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12시간이 지났다. 23일 오후 1시 30분, 국방부는 출입기자단에 “소연평도 해상에서 어업 지도 업무를 수행하던 해수부 공무원이 실종됐고 북한 해역에서 발견된 정황이 포착됐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고 문자로 공지했다. 이씨 사망을 파악한 상태에서 ‘피격 사건’을 ‘실종 사건’으로 은폐 축소한 것이다.

국방부는 이후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시 10시간가량 흘러 오후 11시 언론 매체가 이씨 사망 소식을 전하고 나서야 국방부는 비로소 해당 사실을 뒤늦게 인정했다.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20일 전화통화에서 "월북 여부를 섣불리 예단하기에 앞서 우리 국민이 북측 해역으로 넘어간 중차대한 사실을 즉시 알리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구조를 요청해야 하는데 정부는 손 놓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 하루가 지났다. 정부 공식 발표는 24일 오전 11시 진행됐다. 이에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종전선언을 공식화한 문 대통령의 유엔 연설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고 발표를 의도적으로 늦춘 것 아니냐”는 뒷말이 무성했다. 당시 국방부는 “관련 첩보들을 종합하고 분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해명했다.

갓 취임한 군 수뇌부, 靑 눈치 봤나

2019년 9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군 장성 진급 및 보직 신고식 후 접견실로 이동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원인철 공군참모총장, 문 대통령, 서욱 육군참모총장. 연합뉴스

2019년 9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군 장성 진급 및 보직 신고식 후 접견실로 이동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원인철 공군참모총장, 문 대통령, 서욱 육군참모총장. 연합뉴스

군 당국은 이날 “북측이 이씨에게 총격을 가하고 시신까지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난 27일 “시신 소각이 추정된다”고 말을 바꿨다. 그 사이인 2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통일전선부 명의 통지문을 통해 "대단히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순수하게 SI 첩보 분석만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군 소식통은 "감청 장비 등으로 수집하는 SI 첩보는 워낙 방대해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씨가 설령 '월북' 의사로 추정되는 말을 했더라도 해상에서 오랜 시간 표류 끝에 북한군을 마주한 만큼 상황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은 당시 이씨 시신이 아닌 “부유물만 불태웠다”고 군의 발표를 전면 부정했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에서 “북한 최고지도자가 사과한 것은 이례적”이라며 김 위원장 사과로 사건을 봉합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보란 듯 태도를 바꿨다. 국방부는 지난 16일 입장 발표문에서 “2020년 9월 27일 청와대 국가안보실로부터 사건 관련 주요 쟁점 답변 지침을 하달받아 최초 발표에서 변경된 입장을 설명했다”고 뒤늦게 실토했다.

군 당국이 말을 바꾸는 통에 신뢰가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지휘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북한이 “일방적인 억측으로 ‘만행’, ‘응분의 대가’ 같은 불경스러운 표현을 쓴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고 되레 큰소리칠 때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이를 놓고 막 취임한 군 지휘부가 청와대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서 장관은 실종 신고 접수 사흘 전인 2020년 9월 18일, 원인철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이틀 뒤인 9월 23일 각각 취임했다.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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