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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스타 지우면 뭐가 남을까?"…그녀는 용감한 오사카 나오미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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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랜드슬램 4회 우승' 오사카 나오미의 용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무명 선수
우승 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고
긴 슬럼프에 빠지자 자문하는데…
묵묵하고 선한 선수였던 나오미
자기에게 부여된 이미지를 찢고
사회 이슈에 대해 '낮은 목소리'
비로소 '오사카 나오미'가 되었다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사람들은 왜 스포츠에 환장할까. 무엇이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탄식하게 만들고 소리 지르게 하는 걸까. 이십 년 전 여름, 8차선 도로를 통제하고 띄운 전광판 앞으로 붉은 옷을 입은 수만 명이 쏟아져 나와 대한민국을 부르짖을 때 나는 민트색 티셔츠를 입고 15도쯤 고개를 기울이고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사람 머리통만 한 공 하나를 넣네 마네 하는 걸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열광하고 눈물까지 흘린다는 게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여서 해야 할 일은 좀 더 진지하고 중차대한 무언가여야 하지 않는가 라고 여겼던 것 같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고개를 15도쯤 기울이고 이런 말을 던질 것이다. “웃기고 자빠졌네.”
뒤늦게 체대 입시를 준비 중이냐고 말을 들을 정도로 풋살에 푹 빠진 나는 공을 넣네 마네에 누구보다 연연하는 사람이 되었다. 풋살을 더 잘하고 싶어서 달리기 수업을 받기도 했다. 튀어 나가는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이 탈이 나는 바람에 물리치료니, 추나 치료니, 둘째가라면 서러울 온갖 유난을 떨면서 ‘부상 투혼’을 펼친 선수들에 대한 뒤늦은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어릴 적에 나는 많은 것들을 시시하게 여겼다. 내 관심사는 오직 나 자신이었으나 불행히도 주제를 썩 잘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누구든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면서도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저 작고 옹졸한 우물에서 쉽고 간편하게 시시해 하곤 했다. 정확한 패스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승리에 대한 중압감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도 모르는 주제에. 해본 사람은 해낸 사람을 시시해 할 수가 없다. 오직 무지와 무관심으로 무장된 수레만이 요란하게 시시해 할 수 있다.
다행히 나는 ‘시시해 하기’가 취미인 시시한 괴물이 되지는 않았다. 문학과 예술과 사회 생활로 사람을 듣고 보는 법을 간신히 익혔다. 그 누구에게도 삶은 결코 녹록지 않은 녀석이라는 것을 배우고 또 배웠다. 스무 살에 US 오픈 챔피언으로 등극해 스물세 살까지 총 네 번의 우승을 거머쥔 일본의 테니스 선수 오사카 나오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오사카 나오미 : 정상에 서서>도 그중 하나다. 이기든 지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무명 선수였던 나오미의 삶은 첫 우승과 함께 완전히 달라진다. 매 대회 때마다 전 세계적 기대와 관심이 지나치게 쏟아진다. 아시안 선수 최초 그랜드슬램 우승이라는 꿈을 이뤘지만, 꿈을 이루면 끝나는 영화와 달리 나오미의 삶은 당연히 계속되고 해가 뜨고 지듯이, 태양 같은 기쁨 뒤에 칠흑 같은 패배가 찾아온다. 슬럼프에 빠진 나오미는 자문한다. “미래를 생각해야 해요. 자꾸 현재에 허덕이지 말고요. 저라는 사람은 이겨야만 값어치를 한다고 생각한 지 오래됐어요. 잘하는 테니스 선수란 점을 빼면 저한테는 뭐가 남을까요?”
잘하는 테니스 선수라는 점을 빼고 보기에는 보통 잘하는 게 아닌데? 그랜드슬램 우승자가 저런 생각을 한다고? 마치…우리처럼? n년 차 직장인이라는 점을 빼면 저한테는 뭐가 남을까요? 예술을 하는 작가라는 점을 빼면 저한테는 뭐가 남을까요? 술집을 운영하는 사장이라는 점을 빼면 저한테는 뭐가 남을까요? 벼농사하는 농부라는 점을 빼면 저한테는 뭐가 남을까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점을 빼면 저한테는 뭐가 남을까요?
“나오미가 문제에 봉착한 건 자신을 잊었기 때문이에요. 자신을 특별하게 해주는 강점이 뭔지 잊었죠. 코트에서 다시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려면 마음을 터놓고 말하고 자문하는 게 아주 중요해요. 오사카 나오미는 누구인가?” 나오미의 슬럼프에 대한 코치의 코멘트는 마치 화면 너머의 나를 향해 던져진 것만 같다. 살면서 봉착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우리가 자신을 잊었을 때, 혹은 자신을 잊으라고 강요받을 때가 아닌가.
고등학교 때 라켓 한 번 잡아본 것 말고는 테니스에 대해 아무 경험도 없는 나로서는 그랜드슬램 4회 우승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그랜드슬램 첫 우승 후 타이틀을 지켜야 한다는 극심한 부담감에 시달리는 나오미를 보면서 나는 그저 ‘나라면 스무 살에 탄 우승 상금으로 나머지 인생을 요리조리 잘살아볼 텐데.’ ‘그랜드슬램 우승자라는 타이틀 만으로도 80년은 우려먹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역시 범인의 한계일까.
나오미는 ‘테니스를 사랑하지만, 테니스가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하면서 세상에는 더 중요한 일이 많다고 말한다. 내일 세상이 망해도 코트 위에서 서브 연습을 할 것처럼 보이는 세계 랭킹 1위 선수가 할 것 같지는 않은 말이다. 극 후반부,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목소리를 내는 나오미의 모습이 조명된다. 일본인 엄마와 아이티 출신 흑인 아빠를 둔 나오미는 어릴 때부터 항상 흠결 없는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며 어떤 논란에도 휘말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데, 그건 아마도 자기 자신이 되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욕망이 기능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싶은 말은 쌓여가는데 그 말을 하기에는 겁이 난다고 하던 나오미는 한 테니스 대회에 불참한다고 발표하면서 비로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묵묵하고 선한 사람’이어야 했던 나오미가 자기에게 부여된 이미지를 찢고 사회 이슈에 대해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 위치에 서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고 지냈던 것 같아요. 중요한 일에 사용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이 지점에서 나는 ‘오사카 나오미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는다. 자기가 선 위치를 가늠하고 내어야 할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을 잊지 않는 것. 일견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무명씨인 우리에게도 민감한 사회 이슈에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내게 자격이 있는지, 불이익이 돌아오지는 않을지, 불링을 당하지는 않을지. 따져볼수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편이 안전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건 목소리를 잃어가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이다. 목소리를 낸 후 나오미는 “공허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라고 말하던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인다. 아니, 비로소 오사카 나오미가 된 것처럼 보인다.
삶은 전체 보기를 하기엔 너무 길다. 각자의 생을 하나의 극으로 봤을 때 우리는 연출 의도가 뭔지 죽을 때까지 알 수가 없다. 애당초 의도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1화를 기억할 수도 없고 등장인물은 끝없이 불어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몽땅 사라져버리기도 하고 클라이맥스가 어느 부분인지도 모르고 심지어 종영 시점조차 알 길이 없다. 모든 게 불확실한 삶에 비해 스포츠는 시작과 끝이 확실하고 승리와 패배가 선명하다. 노력한다고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현실과 노력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불변의 진실이 번뜩거리고 혼자 하는 스포츠조차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오사카 나오미는 열다섯 살의 코코 가우프를 상대로 우승한 뒤 공동 인터뷰를 제안한다. 자신과 겨룬 상대가 참담한 심정으로 코트를 떠나지 않고 많은 걸 이뤘다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는 그를 보면서 나는 어떤 순간에도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의 품격에 대해 생각한다. ‘내 경기가 중요한 만큼 네 경기도 중요하다’는 곧 ‘내 삶이 중요한 만큼 네 삶도 중요하다’로 치환할 수 있다. 삶이 스포츠를 닮았는지, 스포츠가 삶을 닮았는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 그렇고 그렇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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