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르코스·두테르테 시대, 방사모로 자치 앞날은?

입력
2022.06.18 04:55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 군인들이 필리핀 대선을 앞둔 4월 23일 마긴다나오 지역 도로를 순찰하고 있다. 거리에는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이 공개 지지한 레니 로브레도 대통령 후보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마긴다나오=AFP 연합뉴스

올해 5월 23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마긴다나오 지역에서 지상전과 공중전이 동시에 전개됐다. 필리핀 정부군은 ‘아부 토래이피 그룹’ 소탕 작전이었다고 설명했다. 민다나오 지역 언론 ‘민다뉴스’에 따르면, 아부 토래이피 그룹은 ‘방사모로 이슬람 자유전사단(BIFF)’에 속한 조직이다. BIFF는 필리핀 최대 반군 단체였던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MILF)’ 이탈 대원과 잔여 조직들이 모인 느슨한 동맹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MILF는 이제 반군 조직이 아니다. 필리핀 정부와 17년 동안 지난한 협상을 벌인 끝에 2014년 3월 27일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맺었고, 이후 MILF는 민다나오 자치를 현실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옛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역(ARMM)’보다 자치권이 한층 강화된 ‘방사모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역(BARMM)’이 2019년 탄생한 건 MILF의 적극적 정치 협상이 이뤄낸 성과로 봐도 무방하다.

BARMM에는 ‘방사(Bangsaㆍ나라)+모로(Moro)’, 즉 ‘모로인들의 자치국’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2019년 1, 2월 주민투표에서 83%에 달하는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 ‘방사모로 기본법(BOL)’은 방사모로 자치의 토대다. 2월에는 무라드 에브라힘 MILF 의장을 정부 수반으로 하는 임시 자치정부인 ‘방사모로 과도당국(BTA)’도 출범했다. 2003년 중반부터 MILF를 이끌어온 에브라힘 의장은 ‘게릴라 전사에서 정부 수반이 된 지도자' 대열에 올랐다.

‘반세기 분쟁 지역’ 민다나오의 평화 프로세스는 이처럼 느리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잔여 무장조직들, 특히 수니파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를 추종하거나 이들과 연계된 극단주의 세력의 산발적 공격이 평화 정착을 방해하고 있다. 국제분쟁 연구기관 ‘국제위기그룹’은 3월 발표한 ‘필리핀 남부 이슬람주의 무장단체 문제 해결’ 보고서에서 “BARMM 출범 이후에도 반군 잔당 200~300명가량이 여전히 활동 중이지만 규모 면에서나 활동 면에서 많이 약화됐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2018년과 2020년 사이 바실란섬과 술루 지방에서 잇따라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2021년 3, 4월 정부군과 BIFF의 충돌로 3만 명 가까운 주민이 피란길에 오르는 등 끊이지 않는 분쟁은 방사모로 자치가 하루속히 자리 잡아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2017년 5개월간 이어진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으로 폐허가 된 필리핀 민다나오섬 마라위 도심을 2018년 3월 상공에서 내려다본 모습. 마라위=AFP 연합뉴스

필리핀 정부군이 마긴다나오에서 작전을 수행한 날은 공교롭게도 정확히 5년 전 민다나오 소도시 마라위를 점령한 IS 연계 반군 ‘마우테 그룹’과 정부군 간 교전이 시작된 날이었다. 당시 무력 충돌은 5월 23일부터 10월 17일까지 무려 5개월 동안 이어졌고, 정부군이 마우테 그룹을 지원한 IS 추종 반군 ‘아부 사야프’ 지도자 이스닐론 하필론을 사살한 후에야 끝났다. 5년 전 마라위 사태와 5년 후 마긴다나오 작전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방사모로 자치와 평화를 향한 여정은 여전히 분쟁의 포화를 곁에 두고 전개 중이다.

흥미롭게도 잔여 반군세력 소탕 작전에는 필리핀 정부군은 물론 MILF 군사국이었던 ‘방사모로 이슬람군(BIAF)’ 대원들도 일부 참여하고 있다. 앞서 2019년 8월 필리핀 정부와 BTA는 안보 협력 이슈에 관한 ‘합의각서(MOA)’를 맺었다. △BIAF는 무기를 반납하고 무장 해제하며 △BIAF 대원 3,000명은 필리핀 정부군으로부터 정식 군사훈련을 받은 뒤 BARMM의 ‘합동평화안보팀(JPST)’으로 편성돼 이 지역 평화 유지 활동에 참여한다는 내용이다. 한때 반군 세력이 과거 적이었던 정부군과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곧 임기를 마치고 새 정부에 정권을 이양할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부는 방사모로 자치와 평화 프로세스를 진전시키는 데 기여한 또 다른 당사자로 꼽힌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익히 알려진 대로 2016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무단 체포와 초법적 처형을 남발, 민간인 6,000여 명을 살해한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 조사 대상(현재는 중단)이 됐을 만큼 끔찍한 인권 범죄로 비판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방사모로 평화 프로세스에 관해서는 두테르테 정부의 대승적ㆍ실용적 접근법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필리핀 정치평론가 리처드 헤이다리안은 “두테르테는 스스로 첫 민다나오 출신 대통령이자 첫 모로인 출신 대통령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며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방사모로 평화 프로세스에 많이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물론 BARMM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과 지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5월 25일 필리핀 국회의사당에서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가운데) 대통령 당선자가 상·하원 의장과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하고 있다. 마닐라=AP 연합뉴스

이제 방사모로 평화 프로세스는 차기 정부의 과제로 넘어간다. 지난 5월 9일 대선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각각 당선된 페르디난도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와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가 이끄는 새 정부는 6월 30일 출범을 앞두고 있다. 대통령 당선자는 1961년부터 1986년까지 필리핀을 철권 통치한 고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이고, 부통령 당선자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이다. ‘독재자’의 유산과 ‘포퓰리스트 스트롱맨’의 유산을 품은 ‘마르코스-두테르테 시대’에 방사모로 자치는 무난히 안착할 수 있을까.

아버지 마르코스 시대에 민다나오에서 모로인들을 겨냥한 국가 폭력이 무수히 자행됐다는 사실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마르코스 주니어가 이번 대선 기간 방사모로 평화 프로세스에 관한 정책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은 우려를 낳는다. 그는 2015년 상원의원 재임 시절 BOL이 “반(反)헌법적”이라며 거부한 적도 있다.

에브라힘 MILF 의장과 MILF 연계 정당 ‘연합방사모로정의당(UBJP)’이 대선 2주를 앞둔 4월 23일 마르코스 주니어의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후보를 공식 지지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에브라힘 의장은 필리핀 언론 인터뷰에서 “로브레도 후보가 방사모로에 관한 포괄적 합의사항을 서둘러 이행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라위 복구에도 속도전을 내겠다고 약속했다”며 신뢰를 보였다. 반면 마르코스 주니어에 대해선 “BARMM에 대한 어떤 계획도 밝힌 바 없다”고 비판했다.

대선 이틀 전인 5월 7일에는 방사모로의 두 대표 조직인 MILF와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이 공동성명을 통해 로브레도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와 별도로 치러지는 부통령 선거에선 두테르테 후보를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두테르테 정부 아래에서 방사모로 자치가 실질적 진전을 이뤘다는 점을 감안한 결정으로 보인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 인근 케손시티에서 5월 25일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 당선인과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당선인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두 사람의 얼굴 모형을 불태우고 있다. 마닐라=AFP 연합뉴스

정치평론가 헤이다리안은 5월 30일 태국 외신기자클럽이 개최한 ‘마르코스의 재현 : 필리핀 선거와 정치를 파헤치다’ 포럼에서 ‘마르코스-두테르테 새 정부가 방사모로 자치에 미칠 영향과 전망’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통령 당선인이 아버지 시대처럼 전쟁을 부추기는 행태를 보일 것 같지는 않다”며 “부통령 당선인을 포함해 민다나오 출신들이 새 정부에 영향력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새 정부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방장관에 누구를 임명할지 등을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헤이다리안은 수십 년간 무장 투쟁을 벌여 온 필리핀공산당(CPP) 반군과 두테르테 정부의 평화협상이 끝내 실패한 배경에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던 점을 들며 “군 관료들의 입김이 무시하기 어려운 변수”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 저널리스트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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