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랩 번안 기계 됐다"...BTS까지 탈진시킨 K팝 시스템의 그늘

입력
2022.06.15 17:08
수정
2022.06.15 20:04
2면
구독

BTS, 팬데믹 기간에 7개 신작
'짧은 시간, 대량 생산' 수익 극대화 부작용
"서태지와 아이들 때보다 더 열악"
"아이돌서 아티스트로 넘어가는 지원 전략 필요"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RM이 14일 유튜브에 올린 '찐 방탄회식' 영상에서 "제가 쉬고 싶다고 하면 여러분이 미워하실까 봐 죄짓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눈은 붉어졌고, 잠시 후 눈물을 훔쳤다. 이 영상에서 방탄소년단은 단체 활동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방탄TV 캡처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RM이 14일 유튜브에 올린 '찐 방탄회식' 영상에서 "제가 쉬고 싶다고 하면 여러분이 미워하실까 봐 죄짓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눈은 붉어졌고, 잠시 후 눈물을 훔쳤다. 이 영상에서 방탄소년단은 단체 활동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방탄TV 캡처

'너를 사랑하라'를 주제로 연작 앨범을 내고 세계 청춘의 희망을 9년 동안 노래한 K팝 아이돌 그룹이 결국 탈진했다. 방탄소년단의 그룹 활동 잠정 중단 선언 뒤엔 짧은 시간 대량으로 창작물을 뽑아내는 데 급급한 기획사 위주 K팝 시스템의 고질적 병폐가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자본주의적 효율과 체계적 관리를 앞세운 K팝 성공 신화의 그늘이다.


팬데믹에도 멈추지 못한 BTS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세계의 일상이 멈췄을 때도 방탄소년단은 쉬지 못했다. 2020년부터 올해 6월까지 '맵 오브 더 솔: 7' '다이너마이트' '비' '버터' '퍼미션 투 댄스' '마이 유니버스' '프루프' 등 7개의 신작을 연달아 발표했다.

2013년 데뷔한 방탄소년단은 9년 동안 싱글과 앨범을 포함해 총 24개의 작품을 냈다. 이 중 앨범만 추리면 16개로, 데뷔 후 6개월에 한 번씩 앨범을 낸 꼴이다. "창작의 고통"을 토로하며 1996년 은퇴를 선언한 원조 아이돌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 4년 동안 낸 앨범 수는 총 네 개. 세계적 조명을 받는 21세기 K팝 시장의 창작 환경이 아티스트의 인권이 외면됐던 20세기보다 열악해졌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대부분의 K팝 아이돌은 숙소 생활로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할 뿐 아니라 시간 단위로 쪼개진 일정으로 원하는 때 제대로 쉬지 못한다. 방탄소년단은 2019년 두 달 동안 첫 공식 휴가를 받았다. 데뷔 후 6년 만에 찍은 첫 '쉼표'였다.

방탄소년단 지민이 14일 유튜브에 올린 '찐 방탄회식' 영상에서 그룹 단체 활동 잠정 중단에 대한 생각을 전하고 있다. 방탄TV 유튜브 캡처

방탄소년단 지민이 14일 유튜브에 올린 '찐 방탄회식' 영상에서 그룹 단체 활동 잠정 중단에 대한 생각을 전하고 있다. 방탄TV 유튜브 캡처


기획사의 잇따른 상장... "소모적 탈진 딱 좋은 구조"

방탄소년단의 소진은 2020년 10월 소속사 하이브의 상장과 맞물리면서 업계에서 조심스럽게 예견되기 시작했다.

김성환 음악평론가는 "현 K팝 시스템은 아이돌의 소모적 탈진을 가져오기 딱 좋은 구조"라고 꼬집었다. K팝 기획사들이 기업화되고 주식시장에 상장하면서 신작 발매를 위한 휴지 기간은 갈수록 짧아졌다. 더 많은 신작을 내 빨리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아이돌이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창작을 준비하는 시간이 줄다 보니 정서적, 육체적 위기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BTS 예술혁명'의 저자인 이지영 한국외대 세미오시스 연구센터 연구교수는 "대부분의 K팝 기획사들이 계약기간에 가능한 많은 이윤을 내려고 아티스트를 상품적 측면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시스템이 아티스트의 성장을 저해하고 짧은 생명력을 가지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1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하이브 보이콧이란 뜻의 해시태그 'BoycottHybe'가 쏟아졌다. 하이브가 '세븐 페이츠: 차코' 등 웹소설, 게임, 대체불가토큰(NFT) 사업을 통해 방탄소년단을 지나치게 상업화하고 소모한다는 거센 반발이었다.

그룹 방탄소년단이 10일 낸 새 앨범 '프루프' 이미지. 빅히트뮤직 제공

그룹 방탄소년단이 10일 낸 새 앨범 '프루프' 이미지. 빅히트뮤직 제공


청춘의 공존과 성장 노래한 일곱 청년 성장 멈춘 아이러니

이런 시스템 속에서 방탄소년단 역시 흔들렸다. 리더 RM은 유튜브에 올린 '찐 방탄회식' 영상에서 "K팝 아이돌 시스템 자체가 사람을 숙성하게 놔두지 않는다"며 "계속 뭔가를 찍어야 하고 해야 하니까 내가 성장할 시간이 없고 랩 번안하는 기계가 됐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연대"를 통한 공동의 성장을 강조했던 방탄소년단 일곱 청년(진·슈가·제이홉·RM·지민·뷔·정국)이 노동을 갈아 마시는 K팝 시스템에 발목잡혀 정작 자신의 성장이 멈추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음악과 삶의 모순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K팝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룹 방탄소년단. 빅히트뮤직

그룹 방탄소년단. 빅히트뮤직


병 드는 아이돌... "공존 구조 마련돼야"

방탄소년단의 그룹 활동 잠정 중단을 계기로 그간 묵과해온 K팝 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트와이스 멤버 정연(공황장애)을 비롯해 오마이걸 지호(이하 불안장애), 뉴이스트 아론, 우주소녀 다원, 스트레이키즈 한, 위클리 신지윤 등 정신적 소진을 이유로 그룹을 떠나거나 활동을 잠정 중단한 사례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성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차장은 "K팝 아이돌은 다른 나라 가수들보다 '감정 노동'이 강도 높게 요구되는 데 세계적 팬덤을 거느린 방탄소년단은 그 과정에서 개인적 소진이 더 심하게 이뤄졌을 것"이라며 "활동 간격을 늘리고 개인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는 게 탈출구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K팝 시스템엔 아이돌이 아티스트로 넘어가는 과도기와 그 이후의 지원과 전략이 부족하다"며 "기획사와 아이돌의 공존 구조가 마련돼야 오랜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양승준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