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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잇몸으로'

입력
2022.06.13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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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을 다독이며 지켜낸 어금니 하나를 머지않아 '발치'해야 할 것 같다. 환자의 위치에서 의사의 진단을 들었을 땐 그런가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조금 복잡해졌다. '임플란트'라는 단어도 소화가 잘 안되는 음식처럼 내장 어딘가에 걸려 있는 느낌이다. 사실 치아만큼 계급이나 상징·문화자원, 그리고 자기돌봄과 밀접하게 연관된 신체 부위도 드물다. 복잡한 마음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 그 가닥을 한번 짚어보았다.

깍두기 하나가 선생님 입에서 빠져나와 설렁탕에 풍덩 빠졌다. 선생님의 흰 셔츠에 빨간 설렁탕 물이 여기저기 튀었다. 며칠 전부터 틀니를 하게 되었는데, 영 적응이 안 된다고, 음식을 주문하며 말씀하셨던 터였다. 민망한 기색은 있었지만, 당사자인 선생님은 크게 당황하지 않으셨다. 예술이론에 밝으신 선생님의 언어를 존경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처했다. 괜스레 엄숙해지기도 했다. 그때 선생님은 50대 초반이셨고 나는 30대 중반이었다. 60대인 지금과 달리, 당시에 나는 틀니가 가리키는 몸 상태에 대한 현실적 이해가 거의 없었다. 흰 셔츠 여기저기에 튄 빨간 얼룩은 현실적 이해에 앞서 상징적 당혹스러움으로 각인되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낡고 상투적인 은유가, 언어의 주체성과 관련해 불쑥 튀어 올랐다.

레네는 전쟁에 강제 징집된 남편이 없는 동안 폭격 속에서 딸 안나도 낳고, 폐허가 된 도시들에서 피란살이를 하며 굳건하게 잘 버틴다. 추위와 굶주림, 심지어 성폭력에도 어린 딸 안나와 행복하고 자유로운, '해방된' 듀엣의 시간을 누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남편이 돌아오면서 이 듀엣의 행복한 공생은 서서히 파괴된다. "바깥에는 평화가 찾아왔는데, 안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급기야 레네에게 안면 마비가 오고, 치아를 다 뽑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말에 남편이 그녀에게 묻지도 않고 치아를 모조리 뽑게 할 때 저 내부의 전쟁은 절정에 다다른다. 독일의 뉴저먼 시네마 '독일, 창백한 어머니'(1980)의 이야기다. 레네가 '발치당하는' 그 장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 치욕과 무기력의 전율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가부장제하에서 언어와 주권을 송두리째 박탈당하거나 당할 수 있는 여성의 실존을 이보다 더 '살 떨리게' 보여줄 수 있을까.

빈곤한 사람들, 노숙자를 비롯한 주거약자들, 경제든 문화든 자원이 없는 발달장애인들에겐 (발치가 아니라!) 이가 '빠지는' 일이, 빠진 채 사는 일이 흔하다. 임플란트는 너무 비싸고 긴 시간의 주의와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라, 나이와 무관하게 이 서너 개쯤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65세 이상이면 임플란트도 건강보험에 적용된다지만, 딱 2개까지다. 나머지는 어쩌라고? 치과의사들은 입 안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고 말하곤 하지만, 사람들의 입 안을 보면 그들이 사는 나라가, 복지체계가 보인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치과의 보철치료를 건강상품에서 공공서비스로 이동시키는 일은 중요한 건강권 의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는 누구를 위한 알리바이인가? 앞에 든 장면들이 보여주듯이 입은 먹고(신체 건강), 말하고(언어 주권), 사랑하는(쾌락) 일의 중추다. 삶의 핵심 '열락'인 이 세 활동을 온전히 펼칠 수 있도록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치의료기술 접근권을 보장해야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이와 잇몸으로' 함께 먹고 말하고 사랑하자.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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