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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송해, 어떤 일도 대충이 없었다… 만남 통해 희로애락 나눠" [윤재호 감독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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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 선생님의 아침은 검소했다. 이른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부엌에는 건강식품들이 수두룩했는데, 잊지 않고 챙겨 드셨다. 그는 세수하고 옷을 입고는 아파트 옆 동에 사는 따님 집에서 소소하게 아침을 먹는 걸 좋아하셨다. 특히 아침에 먹는 누룽지가 참 좋다는 그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항상 유쾌함을 잊지 않았던 그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대충이 없었다. 대충이라는 걸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그는 크고 작은 일에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셨다. 방송 대본을 준비하든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든 꼼꼼히 준비하시는 모습에는 예술인으로서의 그의 열정이 드러났다. 방송과는 다르게 '송해 1927'을 찍을 땐 대본이 없었는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종종 당황하시거나 불편해하시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느새 적응하시는 모습에 정말 프로다 싶었다.
사실 송해 선생님은 어릴 때 일요일마다 보아 왔던 익숙한 얼굴이었다. 성인이 되어 내가 그분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와의 첫 만남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서로 긴장을 좀 한 탓인지 처음엔 조심스러웠지만, 빠르게 송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연세가 있었음에도 마치 친구 같았다. 그만큼 대화를 하기 어려운 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하셨고, 만남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것을 즐기셨다.
영화를 찍으면서 생각한 것이지만 송해 선생님의 삶의 원동력은 결국 사람이었던 것 같다. 만나는 사람과의 교감을 통해 그는 오히려 피곤함을 잊어버리고 더 생기가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찾아주는 사람이 있고 알아봐주는 사람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이 그의 건강 비결이었지 싶다.
그는 한때 멸시받았던 '딴따라' 시절에 겪었던 아픔과 시련을 마음 속에 가지고 계셨다. 지금이야 예술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대우받고 있지만 송해 선생님이 시작했을 그 당시에는 가시밭길이었다.
그런 고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송창진씨가 같은 길을 걸으려 했을 때, 완강히 반대했던 것을 살아 생전에도 후회를 많이 하시고 계셨다. 뼈아픈 기억이라면 재능있는 아들의 노래를 당시에 들어주지 못했던 것. 결국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재발견된, 아들의 음성이 담긴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그의 마음을 울렸다. 우연처럼 다가온 필연적인 아들과의 재회를 통해 한을 푼 것 같다며 아픔을 나누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부모가 자식 마음 모르고, 자식이 부모 마음 모른다고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에는 깊은 여운이 담겨 있었다.
우리 인간은 때론 아픔을 통해 성장하기도 한다. 1927년, 분단 이전에 태어난 송해 선생님의 인생 자체는 역사적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인생은 멸시와 가난으로 시작했지만, 그는 꿋꿋이 버텼다. 포기를 모르는 그는 끊임없는 도전을 하였고, 피나는 노력의 결실은 우리가 다들 알고 있는 '국민 MC' 송해 선생님이다. 그의 뜨거운 열정과 포기를 모르는 도전 정신! 송해 선생님을 추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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