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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 88쌍 결혼식" 서민과 함께 호흡했던 '시대의 어른'

입력
2022.06.08 13:00
수정
2022.06.0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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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송해. 뉴스1

방송인 송해. 뉴스1

송해는 1988년 택시기사들의 중매쟁이로 불렸다. 택시 운전 기사 88쌍의 결혼식을 서울 송파구 잠실에 있는 한 예식장을 빌려 사흘 동안 치러줬다. 올림픽을 앞두고 교통방송(TBS)의 효시인 라디오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8일 송해 지인들 취재를 종합하면, 이 합동 결혼식의 아이디어는 송해의 머리에서 나왔다. 송해가 프로그램 주 애청자인 택시 기사들의 삶을 직접 들여다보기 위해 택시 회사 몇 군데를 둘러 본 뒤 제작진에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택시 기사의 처우가 열악해 결혼식도 못 올리고 셋방 살이를 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직접 확인한 뒤였다.

희극인 송해는 쉽게 웃음을 만들지 않았다. 노동자, 장애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가 늘 뒷전이었던 시절, 송해는 그들을 가장 먼저 무대로 끌어 올렸다. '일요일의 시보, 전국노래자랑 연구'(2011)에 따르면 송해는 원양선을 타는 선원들로부터 1990년대 초에 감사패를 받았다. 배 타고 바다에 멀리 나가면 정말 외롭다고 해서 그 선원들 얘기 한 번 해줬더니, 고맙다고 감사패를 직접 가져왔다는 게 송해의 말이다.

1982년 '전국노래자랑' 예심.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1940)을 절창으로 부르는 참가자를 보고 제작진은 고민에 빠졌다. 지원자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송해는 2018년 KBS2 '대화의 희열'에서 "그 때만 해도 지팡이 짚고 가던 사람이 택시를 잡으려고 하면 운전 기사들이 그냥 가던 시절"이라며 "모두가 즐기기 위해 '전국노래자랑'을 우리가 하는데, 저 분에게 광명은 못 보여줘도 즐거움은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작진을 설득해 본선에 내보냈다"고 말했다. 그렇게 '전국노래자랑' 생방송 무대에 어렵게 선 시각장애인 출연자는 세 번의 앙코르를 받아 삼창을 했다. 신재동 '전국노래자랑' 악단장은 "송해 선생님은 대중을 즐겁게 해주고, 슬픈 사람을 위로해주는 사람을 '딴따라'라 여겼고, 그걸 자랑스워하며 사명감을 갖고 방송에 임했다"고 추억했다.

송해는 방송가의 견고하던 유리천장에 금을 내기도 했다. 남성 희극인들끼리만 짝지어 웃음을 주던 시기, 송해는 고 이순주와 짝을 이뤄 콩트를 하고, 음반('노래와 코미디 제1집'·1971)도 냈다. 당시로선 파격 행보였다. 사회의 편견을 깨는 실험으로 송해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송해는 "경상도 살다 전남 남원으로 시집 온 며느리가 시어머니 즐겁게 해드리겠다고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해 며느리가 노래하고그 옆에서 시어머니가 춤을 췄다"며 "고부간의 위계가 존재하던 때로 방송 후 '볼썽사납다'는 항의가 가마니로 와 사과를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 송해의 주위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①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②낙천적이며 ③소탈한 게 '국민 MC'의 매력이었다. 원로연예인 모임인 상록회의 나채순 실장은 "송해를 보고 늘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배웠다"고 했다. 송해는 2010년 전남 함평군에서 '전국노래자랑' 촬영을 할 때 양봉을 하던 김갑수(당시 69세)씨가 온몸에 벌을 붙이고 무대에 올라 여러 방을 쏘였다. 그때 송해는 "벌침이 한 방에 5만 원"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수많은 이들을 만나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곳곳에서 터지기 마련이지만, 송해는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애썼다. 강호동은 "10여 년 전에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송해 선생님이 보자마자 허리를 잡고 '씨름하자'고 했다"며 "그때 선생님의 기운과 순발력, 뚝심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 송해의 주위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KBS 제공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 송해의 주위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KBS 제공

송해는 1977년 연예인 신고소득자 9위(483만 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100만 원으로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큰 돈이었다. 그런 송해는 그의 사무실이 있던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허름한 목욕탕에서 염색을 했다. 송해는 버스(Bus)와 지하철(Metro)을 타고 걷기(Walk)를 하며 전국을 유랑했다. 소박한 'B·M·W'의 거물 방송인은 지방 촬영이 있으면 늘 하루 먼저 내려가 현지 시장에서 밥을 먹고 목욕탕을 들러 지역 사람들과 허물 없이 소통했다. 그렇게 문턱을 두지 않은 게 송해가 '전국노래자랑'에서 장수한 비결이었다. KBS PD 출신인 안인기 예원예대 교수는 "처음엔 아나운서가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하는데 60대 아주머니가 나와서 얘기하는 걸 받아주질 못하더라"며 "그래서 작은 체격에 편안하고 재치있는 송해 선생을 '전국노래자랑' MC로 처음 섭외했다"고 옛 얘기를 들려줬다.

이렇듯 송해는 동시대의 서민들과 늘 함께 호흡했던 예능인이자 '어른'이었다. "시골에 가면 농토에 가만히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따라서 흔들리는 '사람풀'이란 게 있어요. 그런 거를 내가 터득을 안 하면 못하죠. 급변하는 세대들이 풍기는 감성이라든가 또 얻고자 하는 것을 내가 파악 못하면 안 되잖아요. 그걸 따라가려고 하니까 정말 급할 때가 많아."(송해·'일요일의 시보, 전국노래자랑 연구')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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