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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야구 드디어 ‘와인드업’… 박효철호의 도전이 시작됐다

입력
2022.06.09 13:00
24면

<50> 韓ㆍ베트남 야구 동행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지난 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위치한 미딩 종합경기장 내 운동장에서 박효철(왼쪽)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이 대표팀 상비군 선수들과 첫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지난 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위치한 미딩 종합경기장 내 운동장에서 박효철(왼쪽)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이 대표팀 상비군 선수들과 첫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지난 4일 오후 2시,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여름은 절정을 향했다. 올해 들어 가장 높은 섭씨 37도에 체감기온은 무려 41도. 특유의 습하고 바람 없는 날씨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티셔츠를 땀으로 흠뻑 적셨다. 더위에 익숙한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 상비군 선수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땡볕을 멀리한 채 삼삼오오 그늘에 모여 농담을 건네고 장난치며 시간을 죽였다. 곧 훈련이 시작된다지만 폭염에 긴장도 녹아 내리고 있었다.

그때 흰 운동복을 입은 건장한 중년 남성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짐을 한 곳에 정리한 뒤 개인 장비를 앞에 두고 한 줄로 서 달라." 통역을 통해 전한 그의 첫 마디는 다정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얼핏 봐도 팀의 최고 '덩치'인 주전 포수 바오보다 더 건장한 그의 지시에 선수들의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개인 글러브 뒤에 가지런히 선 선수들에게 그는 "내가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의 첫 감독을 맡은 한국인 박효철"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우린 지금부터 기본부터 하나씩 야구라는 것을 제대로 시작할 것"이라고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박효철(오른쪽)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이 지난 4일 하노이 미딩 종합경기장 내 운동장에서 대표팀 상비군 선수들에게 스트레칭 요령을 알려주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박효철(오른쪽)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이 지난 4일 하노이 미딩 종합경기장 내 운동장에서 대표팀 상비군 선수들에게 스트레칭 요령을 알려주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스트레칭으로 시작한 첫 훈련부터 선수들은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운동 전 야구에 필요한 근육을 체계적으로 풀어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이어진 러닝 훈련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였다. 박 감독의 '와인드업(투구 준비 동작)'을 지켜본 뒤 1루로 견제하는 포즈를 취하면 출발선으로 돌아가고, 투구를 하면 달리는 방식이었다. 볼을 서로 주고 받는 운동을 몇 분 한 뒤 타격ㆍ수비 연습을 하다 마치는 평소 훈련과 다른 체계적 훈련에 선수들의 얼굴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선수들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없이 밝아졌다. 박효철이 누구인지 잘 몰라도, 적어도 이젠 제대로 된 스승이 생긴 것만큼은 분명했던 이유에서다. 지난 5년 동안 코치진이 없었던 베트남 선수들의 유일한 스승은 '유튜브'뿐이었다. "좋아! 그렇지!" 박 감독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커졌다. 훈련 시작 30분 만에 기온은 39도를 넘어섰지만, 선수들의 움직임은 갈수록 민첩해지고 속도가 붙고 있었다.


헐크와의 인연, 베트남으로 향하다

지난 4일 베트남 하노이의 미딩 종합경기장에서 만난 박효철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의 모습.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지난 4일 베트남 하노이의 미딩 종합경기장에서 만난 박효철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의 모습.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박효철’은 한국의 골수 야구팬들에게도 생소한 이름이다. 그는 1990년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으나 부상으로 이듬해 현역 생활을 접었다. 짧은 프로선수 생활 이후 그는 둔촌초(1998~2002년)ㆍ송호대(2002~2005년)ㆍ부천고(2005~2007년)ㆍ한국방송통신대(2008~2009년) 등 학원야구 감독으로 활동했다. 2009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야구 유학을 떠나, 얼바인 돌핀스 클럽 등 미국 아마 야구팀을 지도했다. 한국과 미국에서도 프로팀을 지도한 경험은 전무한, 야구 지도자로서는 다소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미국 영주권까지 취득한 박 감독의 삶은 '헐크' 이만수 전 SK와이번스(현 SSG 랜더스) 감독을 만나면서부터 색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서로를 알지 못했던 두 야구인은 2017년 미국에서 진행된 한 유소년 야구 교육 행사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들은 해외에서의 한국 야구 전파 어려움과 그럼에도 그 필요성에 대해 깊은 공감대를 나눴다고 한다. 박 감독은 "이 전 감독이 대화 중에 '베트남에도 한국 야구를 전파하고 싶다'고 짧게 이야기했지만 그게 실제로 진행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5년이 흐른 지난 4월, 베트남의 초대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찾고 있던 이 전 감독은 박 감독을 다시 떠올렸다.


이만수(오른쪽) 전 SK와이번스 감독이 지난 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미딩 국립경기장에서 실시된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과 박효철 신임 감독과의 첫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이만수(오른쪽) 전 SK와이번스 감독이 지난 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미딩 국립경기장에서 실시된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과 박효철 신임 감독과의 첫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베트남은 야구 불모지지만 발전 가능성만큼은 큰 나라다. 이미 라오스에 한국 야구를 전파해 본 이 전 감독은 베트남 야구를 이끌 지도자를 찾았고, 박 감독은 여타 한국 야구인에 비해 풍부한 해외 지도 경험과 굳건한 야구 철학을 가진 최고의 카드였다.

이 전 감독은 박 감독을 설득한 뒤 그의 프로필과 자신의 추천서를 지난달 베트남 야구협회(VBSF)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에 동시에 전달했다. 이미 이 전 감독에게 수차례 자국의 첫 국가대표팀 감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던 VBSF는 즉시 박 감독을 품었다. KBSA는 '개발도상국 지도자 파견 프로그램'을 통해 박 감독의 현지 생활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운영예산이 전무한 VBSF의 사정을 고려한 KBSA의 조치다.

큰 숙제를 끝낸 이 전 감독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박 감독과 베트남 야구선수들의 첫 훈련 현장에서 만난 그는 "수많은 한국 프로야구 선수 출신 지도자들이 베트남 국가대표 감독직을 희망해 와 꽤 골치가 아팠다"며 "그래도 중요한 건 이름값이 아니라 야구를 막 시작한 외국인 아이들을 잘 이해하고 키워나갈 역량이라 생각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첫 전국방송 타는 베트남 야구, "언더독 반란 가능"

주베트남 한국문화원과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제작한 베트남의 첫 야구교본. 책의 10페이지에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획득 등 주요 성과가 기술돼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주베트남 한국문화원과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제작한 베트남의 첫 야구교본. 책의 10페이지에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획득 등 주요 성과가 기술돼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베트남에서의 첫 여정을 시작한 박효철호(號)는 내달 모국 한국을 찾는다. 초청 주체는 동남아에 한국 야구를 보급하고 있는 KBSA와 한국야구위원회(KBO)다. 두 단체는 베트남팀과 다양한 한국 야구팀들과의 친선전을 주선하고, 이들에게 한국의 선진 야구 시설과 문화도 소개할 계획이다. 주베트남 한국문화원도 KBO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베트남 첫 야구교본을 현지에 배포하기로 했다. 책에는 유튜브에선 배울 수 없는 야구의 기초와 규칙을 기본으로 하고, 한국의 야구 성공 역사도 함께 담았다.

한국 방문을 마친 베트남 국가대표 야구 선수들은 곧바로 흩어진다. 내달 28일 VBSF가 처음 주최하는 '베트남 내셔널컵 야구대회'에 소속 클럽 선수로 출전하기 위해서다. 이 대회는 베트남 국영방송(VTV)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다. 아마추어 경기지만 그들의 야구가 처음으로 베트남 전역에 소개되는 순간이다. 박 감독 역시 이 대회를 유심히 지켜볼 계획이다. 내셔널컵에는 기존의 하노이ㆍ호찌민ㆍ다낭의 클럽팀 외에도 후에ㆍ냐짱 등의 신생팀들도 출전한다.


박효철(왼쪽)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이 지난 4일 하노이 미딩 종합경기장에서 대표팀 상비군 선수에게 뜬 공을 잡을 때 필요한 기본기를 알려주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박효철(왼쪽)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이 지난 4일 하노이 미딩 종합경기장에서 대표팀 상비군 선수에게 뜬 공을 잡을 때 필요한 기본기를 알려주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박 감독의 '옥석 고르기'가 끝나면 국가대표팀 훈련이 본격 시작된다. 1차 목표는 내년 캄보디아에서 열릴 동남아시안게임(SEA)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다. 이 전 감독의 '헐크 파운데이션'과 대구은행이 라오스에서 개최하는 '동남아 국제야구대회'도 또 다른 타깃이다. 당장 이들 대회에서 우승은 어렵더라도 최소 4강에 진입하는 것. 베트남 야구 선수들은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야구 교류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장형 VBSF 고문도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이 고문은 8일 "아직 야구 실력에 큰 차이가 없는 동남아의 현실을 고려하면 베트남이 캄보디아 SEA대회 등에서 언더독(약자)의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충분하다"며 "애국심이라면 한국 못지않는 베트남이기에 야구에서 경쟁국들을 이기기만 하면 현지 인기와 인지도는 수직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모든 게 다 잘 될 것이다. 차고 넘치도록 돌아가는 베트남의 행복회로에도 박 감독은 여전히 침착했다. "야구는 기본기와 희생정신이 가장 중요한 운동"이라고 강조한 그는 "베트남에 한국 야구 문화를 보급하면서 단계별로 선수들을 키워가는 것에 일단 집중하겠다"고 담담히 밝혔다. 다만 한 가지, "기본기가 잘 잡힌다면 그땐 당당히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고 첨언했다. 속도보다 기본. 진중하게 타석을 바라보는 박효철호는 이제 막 베트남 마운드에 올랐다.

지난 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미딩 종합경기장에서 신한은행 베트남법인이 후원하고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진행한 '야구용품 전달식' 이후 선수들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이날 전달식에는 이만수(기념판 왼쪽) 전 SK와이번스 감독과 박효철(아랫줄 맨 오른쪽)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 이장형(윗줄 맨 오른쪽) 베트남 야구협회 고문 등이 참석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지난 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미딩 종합경기장에서 신한은행 베트남법인이 후원하고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진행한 '야구용품 전달식' 이후 선수들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이날 전달식에는 이만수(기념판 왼쪽) 전 SK와이번스 감독과 박효철(아랫줄 맨 오른쪽)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 이장형(윗줄 맨 오른쪽) 베트남 야구협회 고문 등이 참석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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