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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째 이은 침술로 '수만명 의료차트'… 군산의 소중한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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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조성돼 전북 군산의 중심지였던 월명동 일대는 일본식 목조가옥풍의 상점이 즐비한 곳이다. 마치 근대문화도시로 시간여행을 떠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가게는 단연 대한민국 제1호 빵집 '이성당'이다.
하지만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내공을 뽐내 온 또 다른 터줏대감이 있다. 해방 직후부터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지산한의원'이다. 주택식 건물과 고풍스러운 간판이 시계추를 50년 전으로 되돌린 듯 저 멀리서도 옛날 동네 한약방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2일 한의원을 찾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백발의 안재규(71) 원장이 어서 오라는 듯 살갑게 맞이한다. 그와 잘 어울리는 낡고 빛바랜 물건들에서 오랜 세월의 깊이가 묻어났다.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약장(藥欌·약재를 따로따로 넣어 두는 장)과 약연( 藥碾·약재를 갈아 가루를 만드는 기구). 1945년 개업 당시부터 증조부 안종술(1971년 작고) 선생과 부친 안대섭(2006년 작고) 원장이 사용했던 유품들이다.
이처럼 한의원의 유서 깊은 역사를 알려주는 골동품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다. 안 원장 책상에는 조상들의 자취가 켜켜이 묻어 있는 의학서 '방약합편(方藥合編)'이 놓여 있다. 지금도 안 원장이 처방편람으로 참고하는 가보다.
또 책장에는 77년 전부터 증조부와 부친이 기록한 수만 명분의 진료차트 수백 권이 빼곡히 꽂혀 있다. 여기에는 과거 군산 사람들의 질환과 관련된 치료 내용들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 자체로 군산의 역사인 셈이다. 그는 "부친이 작성한 차트를 참조하면 환자의 조부모와 부모의 가족력까지 꿰뚫어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면서 "진료차트가 근현대 지역민들의 병리학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안 원장은 한의대 대학원에 진학한 1년 후 학업을 겸하며 1977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이름이 같은 '지산한의원'을 개업했다. 매일 부친과 전화통화로 처방을 상담하며 조상대대로 내려온 의술을 익혔다. 이 같은 가르침 덕에 침술을 제대로 배웠고 환자들이 몰려와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세계약침학회장을 지내는 등 왕성한 대외활동으로 한의사업계에서는 유명인사로 통했다.
그는 2002~2005년 34대·35대 한의사협회장을 맡았다. 회장 재임기간 △한의약육성법 제정 △한의사 군의관제·공중보건의제 도입 △대통령 한의사주치의 임명 △한의사협회 회관 건립 등 굵직한 현안들을 줄줄이 해결했다. 뚝심있게 밀어붙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부인 김인경(69)씨는 "당시 한약분업 사태가 불거져 남편이 홍보이사 시절부터 병원은 뒷전이고 협회 일에 매달리는 바람에 1988년부터는 간호사들을 내보내고 현재까지도 제가 모든 업무을 도맡고 있다"면서 "아버지 도움으로 먹고사는 것 걱정하지 않고 정부를 상대로 시위하러 다닐 수 있었다"고 거들었다.
이처럼 서울에서 '잘나가던' 그는 2006년 5월 부친이 사망하자 한 달 만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17년째 '지산한의원'을 지키고 있다. "가업 승계도 중요하지만 동네 어른들의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한의원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면서 "솔직히 군산에는 친구 한 명 없는 아내가 낙향 결심에 불만 없이 따라줘서 가업을 잇는 게 가능했다"고 고마워했다.
안 원장은 "동료들은 제가 군산에서 얼마나 버틸지 의구심을 가졌지만 '명의'로 존경받은 부친과 한의원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성심껏 진료했다"고 말했다. 이어 "부단히 연구하느라 힘이 들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곳에서 명맥도 유지하면서 인술을 펼치고 있으니 그저 행복할 뿐"이라면서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본래 안 원장 집안은 1800년대 초 본향인 전북 남원시 대강면에서 4대조부터 7대조까지 한약방을 가업으로 이어왔다. 군산에 터를 잡은 것은 1945년 당시 군산경찰서장이었던 친척의 권유로 현 위치 뒤에 있는 건물에서 증조부께서 '군산의원'이란 상호로 개원하면서다. 이후 한의사제도가 신설되자 본인의 호(지산·芝山)를 따서 '지산한의원'으로 바꿨다.
증조부는 당시 의료서비스가 열악한 점을 고려해 '365일 24시간' 문을 열고 환자가 있는 곳에 항상 함께하는 참의료인의 정신을 실천해왔다고 한다. '인근에서 그분의 침을 맞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나이 든 토박이들은 기억하고 있다. 안 원장은 "증조부께서는 '참의술을 행하면 월명산 꼭대기에 병원을 열어도 환자들이 찾기 마련이다. 오직 진정한 의인의 길을 걸어야 한다'라는 신념을 가진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앞으로 '지산한의원'을 개축하거나 리모델링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그는 "우리 사회 어느 부문에서든 전통을 잇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증조부에게 의술을 배워 1959년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선친은 증조부와 함께 환자를 돌봤다. 1971년 증조부가 돌아가신 뒤 한의원을 이어받아 번창시켰고, 1986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안 원장은 예전 한의원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지난해 처분했다. 선조의 흔적과 추억이 스며 있는 곳이라 팔고 싶지 않았으나 부인이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 관리하기 힘들어 팔았다며 아쉬워했다.
"1970년 경희대 한의대에 수석입학하자 증조부께서 아주 기뻐하셨던 모습이 생생하다"는 그는 가풍 때문에 어릴 때부터 숙명처럼 생각했고 적성에도 잘 맞아 한의사의 길을 걸었다. 동생 재길(63)씨도 원광대 한의대를 졸업한 뒤 부친 밑에서 부원장으로 4년 동안 살았다. 어느 정도 부친의 의술을 전수받자 1993년 대전 서구에서 '지산한의원'을 개업해 '지산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외아들 동선(36)씨가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4년 전부터 부원장으로 일하고 있어 기쁘다고 한다. 아들은 노래에 소질이 있어 가수가 되고 싶은 마음에 중학교 때 연예기획사를 몰래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어릴 때 소파에다 침을 놓으며 놀 정도로 한의사 기질이 있는 데다 가업 승계를 위해 기꺼이 한의사로 방향을 돌렸고, 음악실력은 선교활동을 위해 재능기부하고 있다.
"귀향 후 주변 한의원 원장들과 매주 월요일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처음 6명으로 시작해 이제 3명밖에 남지 않았고, 언젠가 혼자 될 것 같아 허탈하다"는 그는 "아들이 앞으로 한의원을 떠나 해외 선교활동에 전념할 것 같다"면서 "나중에 의술공부를 더 하고 양의사인 며느리(최라윤·33)와 함께 한의원을 이어가는 게 소원"이라고 속마음을 내비쳤다.
한의사협회장 출신답게 안 원장은 "후배들이 한의사도 MRI(자기공명영상장치) 등 현대 진단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명확한 법 조항을 신설하는 데 최선을 다해 주길 바란다"면서 "법이 제정되면 한의원 환자들이 진단만을 위해 양방의료기관에 방문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의료비 절감과 중복 방문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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