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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죽었는데 눈물이 안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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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일상다반사를 들려주세요. MBTI상 확신의 논리형(T)인 8년차 기자와 뼛속까지 공감형(F)인 4년차 기자가 하나의 고민에 서로 다른 콘텐츠를 추천하는 큐레이션입니다. 평범한 이웃들의 비범한 고민에 특유의 단짠 제안을 해드립니다.
11개월 전 사랑하는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어요.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었죠. 빈자리는 너무 컸지만 슬픔을 느낄 여유는 없었어요. 당장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 둘을 생각하면 아픔도 사치였어요.
그래서 더 악착같이 일만 했어요. 입관식 때만 목 놓아 울었고, 그 이후에는 얼른 일상에 복귀하려고 했죠. 남편 생각이 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서 잊으려고 했어요. 쉴 때도 일부러 몸을 더 움직여 떨쳐버리려고 했어요. 퇴근 후에는 육아와 가사 노동을 하면서 잡생각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죠.
주변에서도 저를 많이 걱정해줬어요. 부모님도 시부모님도 제게 힘든 기억을 빨리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조언해줬어요. 그래서 더욱 이 악물고 살려고 했어요.
11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눈물이 안 나요. 슬픔보다는 무기력과 두려움이 더 커요.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자요. 만사가 귀찮고, 의욕도 없어요. 내 옆에 남편이 없다는 사실과 앞으로 또 아이들을 키우고 혼자 살아가야 할 생각에 무섭고 불안해요. 하지만 이 불안을 얼른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더 크네요.
아직까지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가슴 벅찬 순간도, 남편의 뼛가루만 남은 순간도 생생해요. 오히려 남편을 처음 잃었을 때보다 근래 그 증상이 더 심해졌어요. 이렇게 열심히 살아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삶의 덧없음과 무가치함에 대해 많이 곱씹고 있어요. 나만 살고 있다는 죄책감도 들어요.
김현주(가명·49·직장인)
애착이론 창시자인 영국의 심리분석임상가 존 보울비에 따르면 애도는 3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아 그냥 멍해지는 시기(무감각 단계), 죽음을 실감하면서 극심한 상실감·공허감·외로움으로 고통받는 시기(혼란 단계),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우울, 절망을 거쳐 다시 삶의 즐거움을 찾기 시작하는 시기(재조정 단계)가 그것입니다.
현주씨는 무감각 단계가 유난히 긴 상황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을 사회적으로 학습하는데, 우리 사회는 슬픔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저는 현주씨에게 영화 '데몰리션'을 추천합니다. 주인공 데이비스도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비탄, 상실감, 무기력은 먼 얘기인 듯합니다. 멀쩡하게 옷을 차려입고 출근하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도리어 불편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별에 의한 절망의 수순을 밟지 않는다고 마음이 다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방식과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게 오는 것일 뿐이니까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이비스는 어느 날 자판기 회사 고객서비스 직원과의 만남을 통해 서서히 변화하게 됩니다. 무감각 단계와 혼란 단계가 뒤섞이게 된 것이죠.
데이비스는 집 안의 가구에서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집까지 샅샅이 분해해 때려 부숩니다. 또 도로 한복판에서 헤드폰을 끼고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기도 합니다. 아마 이 모든 파괴의 과정은 데이비스에게는 조금 색다른 애도의 방식일 뿐이겠죠.
파괴, 폐허, 폭파. 조금은 무서운 단어들이죠. 하지만 이 모든 건 재건축 혹은 복원을 위한 전제 작업일 뿐입니다. 더 잘 쌓아올리기 위해선 잘 망가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견고한 중심을 만들어갈 수 있죠.
철저히 망가지고, 또 새롭게 세워지는 그 과정. 현주씨도 영화 속 데이비스처럼 이 시간을 본인만의 방식으로 잘 보낸 후 재조정 단계에 진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현주씨,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상실의 마음 앞에서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조심스러워집니다. 모든 이별은 상흔을 마음에 남기지만, 그중 갑작스러운 사별만큼 황망한 것이 없을 겁니다.
게다가 충분히 애도할 새도 없이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유지하는 등 곧바로 생활 전선에 내몰리다 보면, 이렇게 큰 슬픔은 잊히고 무뎌지는 게 아니라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멍에가 되고 맙니다.
그런 현주씨에게는 지금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애도는 사회에서 강요하거나 표준화한 그런 형식일 필요는 없어요. 누군가는 며칠 내내 목 놓아 우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고인과의 기억이 있는 곳을 다시금 밟아보는 모습일 수도 있고요.
오늘 추천하고자 하는 이 책, 사과집 작가의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3일간의 장례식과 사후 처리 과정에서 받아들여야 했던 일을 담담하게 써내려간 자전적 책입니다. 저자 역시 현주씨만큼 황망한 상태로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는데요. 10개월간의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부친상을 치르게 됩니다.
제목과는 달리, 책에서 저자는 누구보다 온전하고 완전하게 자신만의 애도 방식을 담담하게 풀어갑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기록하고,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남겨진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면서 말이죠.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계기로 저자는 자신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거나 노년을 계획하면서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법'에 골몰하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상실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추동이 된 셈이죠. '아빠의 끝'이 '나의 시작'이라면서 말이죠.
현주님, 이처럼 '정상적이고 완벽한 애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애도에는 합당한 자격과 형식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철저하게 계획해 감정을 추스릴 수도 있고, 그 계기는 아주 우연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생계와 미래가 막막해 마음의 여유가 들지 않을 수 있지만, 아주 소소하고 간단한 데에서부터 현주님만의 애도를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언젠가 모든 연결된 감정은 해방되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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